서른번 직업을 바꾼 남자203 아들의 질병 때문에 종교까지 개종한 어머니 부제: 독실한 불교도인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연. 지극한 어머니의 사랑은 모든 종교의 사랑과도 일치. 나는 형님이 백반증으로 고생해온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몇 가지 사실들을 뒤늦게 알게 된 부분이 있었다. 형의 백반증이 고3 무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중2 때였다고 한다. 당시에 눈으로 표시도 안 나는데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지라 너무 어려서 뭘 몰라도 한참 모르던 철부지여서 흰 점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시계를 차던 형 손목에 실처럼 조그만 흰 자국이 나타났다. 형은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외관상으로 봐서 큰 문제는 없어 보여서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형이 말을 안 들어서 생긴 흰 줄이라고 놀렸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건만 어머니는 그 때 아들에게 던진 그 농담.. 2009. 7. 30. 백반증 형과 결혼한 외국인 형수, 형 만큼이나 기구한 운명 부제: 백반증 형과 결혼한 형수, 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 형수는 집안 식구들의 권유로 결혼중개소에 들렀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국 남자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어딘가 우수에 빠진 눈빛이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어리고 훨씬 키 크고, 예쁜 여자들이 많았다. 당연히 같이 갔던 예쁘고 늘씬한 여동생이 선택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형은 형수를 선택했다. 나중에 형수가 ‘좋은 여자들이 많았는데, 도대체 왜 나 같은 사람을 선택했냐?’고 물었다. 형은 ‘그냥 좋았다.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대답을 했다. 형수는 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 한 번도 어머니부터 포옹조차도 못 받아봤다고 말했다. 그래도 한국에 결혼한다고 하니 그제야 식구들이 처음으로 안아줬다고 하는 것이다. 형은 가족들이 너무 .. 2009. 7. 29. 병든 자식에게 평생토록 죄의식까지 느끼며 살아온 부모님 형님은 정관복원술 후 한 달가량 쉬었다가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은 풀리지 않았다. 사업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필리핀 사람들 밑에서 몇 푼 받지도 않는 돈을 받고 일하기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대개 막노동의 일인데, 해봐야, '너 같은 한국인이 왜 이런 일 하느냐?', '너 때문에 우리 일자리 없어진다.'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형과 같은 한국인에게 주어질 만한 필리핀 주재 한국 회사도 없었다. 형이 그동안 해놓은 사무직쪽의 경력이나 능력도 없기에 좋은 회사에는 취직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성실하게 일하는 것 뿐. 형은 자신을 채용해주겠다고 말한 한 한국인 사업가의 말만 믿고 거의 6개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해버렸다. 내가 봐도 답답할 정도.. 2009. 7. 28. 백반증형, "태어날 아이에게 유전될까" 걱정스러 정관수술했으나... 부제: 아이가 백반증에 걸릴까 우려해 정관수술했던 형님.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으로 복원수술 고민... 형님은 자신의 ‘백반증’이라는 처지 탓에 결혼 자체를 포기했다. 하지만 비록 늦게나마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집안 식구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결혼식이 진행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작은 공장에 함께 취업했다. 공장에 딸린 방도 있어서, 그곳에서 근무도 하고, 야간 경비 업무도 할 겸해서 두 사람이 함께 지냈다. 덕분에 돈도 착실하게 모을 수 있었다. 제법 안정된 생활이 2년가량 지속되었다. 자동차 부품회사였다. 자동차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이라 생산이 못따라갈 정도였다. 주문량이 많이 늘자 공장 확장 작업이 필요했다. 형은 야간 근무를 할 경우.. 2009. 7. 27. 병으로 결혼 포기했던 형,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생각하게 되고... 형님 역시 다른 백반증 환자들처럼 사람들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군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하지 않았다. 나이트클럽의 웨이터로 취직했다. 밤에는 백반증이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한 직업이었다. 비록 밤일이었지만 형의 보수는 꽤 짭짤했다. 월급보다는 팁이 더 많았다. 새벽에 돈을 한 뭉텅이씩 가져오곤 했다. 대학생인 나에게 용돈도 조금씩 주곤 했다. 가끔 만 원짜리 한 장을 몰래 꺼내 쓰기도 했다. 미안해 말은 못했지만, 그래도 나중에 다 갚았다. 웨이터 일이란 급여보다 팁이 많은 일이다. 그러니 손님들의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 그런데 술 취한 취객을 다룬다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손님들과 다투는 일도 많았다. 2년가량 일하다 때려 치웠다가 일했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그만 두었다. 사람들.. 2009. 7. 22. 차라리 암에 걸리는 것이 더 좋겠다고 호소하던 형님 부제; 백반증 앓는 형, "차라리 암에 걸리는게..." 남들에게 공개하기 꺼리는 가족들의 비밀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남한테 말하기 조금 민망한 이야기가 있다. 형님의 ‘백반증’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뭐지?’라고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백반증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별 일 아닌 것 가지고 뭐 그래'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직접 겪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렇게도 여겨지지 않는 백반증.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주는 질병. 이 병이 형님의 인생을 엉망으로 망쳐버렸다. 내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식으로 몇 개의 글을 써볼까 한다. 형님이 스무 살 경에 흰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미 백반증의 기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2009. 7. 13. 20년전 6월항쟁과 민주주의의 후퇴, 오늘까지 이어지나? 유월은 내게 특별한 달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20여 년 전 군대를 입대한 달이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못돼 대학을 더 다닐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1987년 6.10항쟁을 통해 그토록 투쟁하고자했던 군부도 타도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면을 쓴 전두환 정권의 앞잡이 노태우의 6.29선언에 온 국민이 속아 넘어간 달이 유월이기도 하다. 당시 군부타도의 기회가 있었건만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 단일화를 끝내 이루지 못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10년 후퇴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한탄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지독하게 매달렸던 학생운동에도 회의가 느껴졌다. 게다가 축제기간에 발생한 패싸움으로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에 간접적으로 기인한 탓에 개인적 죄책감도 있었다. (이미지출처: 네이버 .. 2009. 6. 3. KTX 사진공모전 2등에 당첨된 사연 지난 4월 KTX가 개통한지 5년이 되었다. 다양한 이벤트와 행사가 있었다. 그런데 내 사진이 디카 콘테스트 2등에 당첨된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볼품없는 사진으로 어떻게 당첨이 되었을까? 물론 사진 촬영기술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200자 이내로 사연을 써서 응모하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 때 보낸 사연 덕분에 당첨 된 것 같다. (오른쪽 상단 귀퉁이에 2등한 내 사진이 보인다) KTX 디카 콘테스트에 응모했던 사연 제목: 주말부부로 헤어질 때마다 눈물 흘린 우리 가족 가난해서 주말부부를 했다. 가족은 부산에 있었고, 혼자 서울 생활했다. 함께할 수 있는 주말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헤어져야만 되는 시간은 고통이었다. 기차역에서 준영이가 ‘아빠 가지마!’라고 외치며 눈물을 흘리면 모두 눈물바다.. 2009. 5. 19. 내 아버지를 통해 바라본 한국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보다 올해 어버이날 잘 보내셨는지요? 부모님께 감사의 말씀은 전하셨는지요? 저는 입 밖으로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면서도 말로 꺼내지 못하고 편지로 대신했습니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장난스럽게다로 말을 건넜는데, 아버지에게는 말로는 건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달리 왠지 어색하고 서먹함이 남아서 일까요? 도대체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족 구성원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존재일까요? 어버이날을 맞아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한경에 실렸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어버이날에 맞춰 실린 것 같습니다. 한국경제신문에서 운영하는 한경비즈니스에 보냈던 원고입니다. 읽어보시고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혹자.. 2009. 5. 12. 취업실패,사업실패.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는다! 어렵게 취업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해고당했다. 죽고 싶었다. 몇 년간의 경력을 쌓아서 사업에 도전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난 지지 않는다. 어떤 실패와 역경에도 나는 일어서고 말 것이다. 나는 작은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낼 때다. 혼자서 책을 쓰느라 수염도 한 가득 길렀다. 오랜만에 준영이가 놀러와 한 컷 찍어둔 사진이다. 사업실패에 대한 내 교훈은 포스팅 해둔 글이 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별도로 포스팅 하도록 하겠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공개하며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짐해본다. 관련글: 나의 사업실패 교훈 ) 1. 사업에 실패했다. 하지만 난 지지 않는다! 몇 년간 몰입하던 사업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사업실패에는 여러 가지 총체.. 2009. 2. 16. 블로그 덕분에 MBC방송 출연하다! 블로그에 올린 글 덕분에 MBC 출연! 작가가 주인공이라 하기에 잔뜩 기대! 여러분 방송 한 번 타 봤어요^^ 안 타봤음 말을 말아...(개콘, 김병만 버전^^) 사실 제가 뜻하지 않게 몇 번의 방송을 타 본적은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잠깐 나온 적도 있었고, 방송NG가 발생해 군인 아저씨 프로그램에 나와 본 적도 있고, 여러 차례 전문가 인터뷰 해본 적도 있고, 전문가 패널로 출연해 본 적도 있고, 케이블TV와 라디오에서 작은 강연도 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꽤나 나왔네요^^(잘난 척-_-;;ㅋ) 그런데 이번에는 블로그 덕분에 공중파 매체에 제대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MBC 프라임’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입니다. 2월3일 화요일 밤12시25분에 방송예정입니다. 작가님 말씀으로는 제가 주인.. 2009. 1. 29. 가족내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불쌍한 한국의 아버지 어머니와 달리 소외받는 존재 "아버지" 집안에선 귄위 세우지만, 사회에선 찬밥 신경 쇠약으로 정신병원까지 입원한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에게 와 같은 존재 한국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한국사회에서 어머님의 무한하고 자상하신 사랑이야 너무나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뒷전에 놓인 듯한 우리 한국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부끄러워 아버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나눠도 꺼리낄 것 없어서 한자 적어 본다. 혹자는 한국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뼈 빠지도록 일하지만 사실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 2008. 12. 31.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