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7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내 인생을 바꾼 한 마디!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책들이 있습니다. 30대 중반까지 꿈과 희망도 없이 단지 편안하게 노년을 즐기는 것이 제 인생의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 교수의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답니다. 드러커 교수가 던진 단 한마디의 말이 저를 바꿨는데요. 어떤 말이었는지 SBS독서캠페인 방송을 통해서 들어보시죠. (참조: 플레이버튼을 클릭하시면 소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SBS독서캠페인 홈페이지 를 클릭해서 맑은 소리로 들어보실 수도 있는데, SBS에서 아직 올리질 않으셨네요. 월드컵중계 방송으로 인해 정말 정신없이 바쁘시답니다-_-;;;ㅋ) 주제: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 안녕하세요. 커리어코치 정.철상입니다. 저는 .. 2010. 7. 3. 30대까지 꿈을 가지지 못한 나에게 삶의 변화를 이끌어준 드러커 교수의 한마디 ‘경영학의 아버지’. ‘지식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드러커 교수. 95살의 고령으로 죽는 날까지 저술과 강연, 컨설팅으로 왕성히 활동했던 경영학의 구루. (guru: 인도말로 원래 ‘무겁다’는 뜻이었으나,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뜻의 극존칭으로 사용됨) 그는 살아있는 동안 30여권의 명저를 발간하며 탁월한 필력으로 실제적인 경영 지식을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GM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 컨설팅과 마셜 플랜 등의 국가적인 정책에도 자문 역할을 해왔다. 경영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역할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으며, 또한 경영은 누구나 배워야 되는 일반교양이라고 주장하며 경영개선 활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드러커 교수. 그래서 그를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미지출처: http.. 2008. 11. 22. 드러커교수가 전하는 프로페셔널의 7조건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책을 보면서 피터 드러커 교수를 나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 소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도 완벽을 추구해보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 소위 지식인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되는지, 어떤 일들을 수행해야 되는지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면서 답을 찾아가는 방식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제자에게 던지는 대화법 같다. 경영이나 비즈니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책을 최소한 두세권은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드러커 교수가 살아가면서 자신이 느끼고 겪은 7가지 경험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이 된다.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스트가 되기 위한 7가지 경험을 알아보자. (이미지출처; 인터넷서점 yes24) 드러커교.. 2008. 4. 25. 내 인생을 바꾼 단 한 줄의 문구 아주 예전 업무를 마치고 밤에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머리도 안좋은 내가 머리 쓰려고 하니 머리가 너무 아퍼요-_-;;;”라고.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 말씀, “아냐, 넌 머리 좋으니깐 걱정마. 머린 조금만 써라^^”라고 하신다. 마치 귀 큰 개구리가 친구들의 귀크다는 놀림에 대해 이야기한 후에 귀가 가렵다고 하자 '응, 귀파게 숟가락 가져와라'와 같은 늬앙스다^^ 그래도 이런 어머니의 따뜻함이 나를 키워왔다. (이미지출처; 네이버 junwon21님의 블로그, 내 인생의 스승 피터 드러커) 당시에 몇 주 동안 이런 두통이 반복되었다. 사실 대부분 머리를 써서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머리를 쓸 일을 생각하면서 미리 걱정하면서 머리가 아픈 것이었다. 그러니 일종의 꾀병인 셈이다... 2008. 1. 12. 피터 드러커 생애 - 유럽에 대한 실망 함브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시절: 기업과 사회에 대한 관찰 드러커는 1927년 빈 김나지엄을 졸업하고, 그 해에 독일 함부르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며, 재학중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3개월간 견습생으로 근무했다. 1927년이 다 저물어 갈 무렵, 견습서기로 취직한 지 4개월 만에 드러커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어 빈에 돌아왔다. 그런 드러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간지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Austria Economist)의 신년 특집호의 편집회의에 나오라는 초대장이었다. 드러커는 열 네댓살 무렵부터 그 잡지를 애독하고 있었으나 편집자와는 만난 일은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에서도 이름있는 잡지였다. 창간 당초는 [런던 이코노미스트](London Economist)를 모델로 하.. 2007. 12. 13. 피터 드러커 생애 - 지적 분위기속에서... 살롱과 도서관 드러커가 어린 시절부터 유럽 상류사회의 사교 및 지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게 된데는 전술한 헴의 처 게니아 여사가 운영하는 살롱에 초대되면서 부터였다. 그녀의 살롱에 출입하는 사람 가운데는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도 있었다. 드러커는 "내가 그녀의 살롱에서 만을 만난 것은 16세 때였다. 만은 노벨상을 받기 수년 전이었는데, 그는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게니아의 살롱에서는 누가 언제 [주역]이 될지 몰랐다. 내가 출연자석에 최초로 앉은 것은 14, 5세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세계무역에서 파나마운하의 영향]을 조사하고 있었다. 개통한 지 10년 안팎이라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고 회고.. 2007. 12. 13. 피터 드러커 생애 - 격동의 20세기 초 2005년에 작고한 피터 드러커 교수는 내 인생의 멘토이기도 하다. 드러커 교수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정과 교훈은 '나의 인생, 나의 꿈'에 별도로 올리도록 하겠다. 국내에서 드러커 교수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대구대학교 총장출신의 이재규 박사님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드러커 교수에 대한 정보를 옮겨본다. 죽는날까지 완벽을 추구하신 그 분, 또한 그 분을 뛰어넘고자하는 분들에게도 큰 교훈이 되리라. 1. 격동의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부모의 영향 피터 페르디난드 드러커(Peter F. Drucker)는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부친 아돌프는 오스트리아의 재무성 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모친.. 2007. 12. 1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