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번 직업을 바꾼 남자203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보이는데, 왜 내 나만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까? 전국 여행에 도전했다. 그러나 계획했던 긴 여행을 외로움으로 나흘만에 접는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문제를 피하지 말고 도전해보자’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되돌아서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여행으로부터 무언가를 하나 더 가지고 가고픈 욕심이 들었다. 문득 단풍이 물든 설악을 밟아보자는 욕심이 들었다. 새로운 목표를 잡자 조그만 희망이 올라오는 듯 기뻤다. 설악의 단풍잎이라도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풍을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아름답게 보인다. 새로운 설레임으로 설악산을 당도하는 순간 나는 붉게 물들은 단풍나무쪽으로 아이처럼 신나게 뛰어갔다. 아주 손쉽게 아름다운 단풍잎을 풍성하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단풍잎에는 흉이 많이 나있었.. 2008. 11. 24. 해고당한 후, 죽고 싶었다! 해고된 첫날 하루내 멍하니 집에 있었다. 마치 내 머리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내 처지가 싫었다. 죽고 싶었다. 정신이 들 때면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멍하게 며칠을 보냈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올 용기도 없었다...... 불현듯 ‘한국은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내면으로는 ‘지금 내 실력으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이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어머님께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집안 형편이야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부모님의 힘으로 갈 수는 없었다. 돈 한 푼 안주셔도 좋으니 허락만해주시면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미 내 나이는 서른이 넘어 버렸다. 해고당한 후의 결심 "한국에서는 안돼! 미국으로 갈꺼.. 2008. 11. 20.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의 의미?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린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많은 나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된다는 것에 깜짝 놀랬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나에게도 드디어 20대의 청춘이 피었다가 져버리는구나!"라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많이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마흔이 되니 그런 느낌도 없다. 오히려 훨씬 무덤덤해진다. 포기한 탓일까? 무엇보다 나이 마흔 정도가 되면 인격적으로 훨씬 더 고결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공자님의 말씀처럼 '불혹(不惑)'이라면 어떤 것에도 '미혹(迷惑)'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것에 흔들리고 여러 가지 욕심에 현혹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까지 젊음의 열정이 남아 있다고 느끼며 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 2008. 10. 27. 첫 직장, 첫 해고로 끝났던 뼈아팠던 기억 첫 직장을 어렵게 겨우 들어갔다. 지방의 한 방송국이었다. 주로 외신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악필이라 번역 후에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물론 좋은 필체라해도 워드 작업은 피할 길 없었다. 문제는 내가 독수리타법이어서 번역하는 시간보다 컴퓨터로 옮기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1년쯤 일하면서 독수리 타법도 벗어나게 되었다. 아마도 번역하면서 늘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 PC 통신의 채팅을 하면서 타수가 늘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영어 실력도 학교에 비해서 제법 늘었다. 외신을 주로 다뤘으므로 국제적인 감각도 많이 늘었다. 게다 사회, 경제적 현상과 더불어 다양한 분야의 지식까지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방송국에 들어온 지 2달가량 되었을 즈음에 아나운서가 .. 2008. 8. 25. 거듭되는 입사탈락으로 양치기 소년 되다!!! 제대 후 복학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제대로 시작해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공부가 어디 하루아침에 되겠는가? 전공이 영어였지만, 나의 수준은 정말 엉망이었다... 외국인의 말 한마디 못 알아듣던 형편없던 영어실력 신입생 때는 영어회화시간에 주로 장난치고 놀았다. 한 번은 떠들고 있는 나를 보고 외국인 강사가 나가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의미를 이야기해 줘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래서 영어로 사과를 한다는 것이 연신 “I'm sorry, I'm sorry,,,"를 반복하는 형편없는 영어실력이었다. (이미지출처: 중앙일보07년12월7일자 인터넷전화 학습도구로 진화하다) 외국인 영어강사 수업 모두 수강하다 복학 후 .. 2008. 8. 22. 87학번인 나 대학시절에 분신자살을 꿈꾸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대학을 어렵게 들어갔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비를 벌어야했기 때문에 야간을 선택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서 술만 마셨던 것 같다. 거의 매일 마셨다. 정말 죽도록 마셨다. 지금은 소주 한 병도 제대로 못 마시지만, 그땐 7병까지 마셔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너무도 나 자신이 싫었다. 그렇게 술로 나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봉제공장 시다바리로 첫 직장을 다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봉제공장의 시다였다. 잡무를 하는 사람을 ‘시다’라고 불렀다. 사실 일본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봉제공장의 거의 모든 단어들이 일본어에서 유래된 말이 많았다. (영화 ‘친구’가 히트하면서 다들 한 번씩 들어.. 2008. 8. 20. 버려진 버스에서 살았던 내 어린시절의 추억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아버님은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작은 동네였지만 꽤나 재산이 있으셨다 하신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거의 한 번도 넉넉한 형편으로 살았던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10여 년간이 넘는 직업 군인 생활을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월남전에서 불명예로 제대하게 되었다. 억울하다고 통곡만 하시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셨다. 결국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셨고 사업을 하셨다. 하시는 일마다 쪽쪽 망했다. 결국 만석꾼을 넘던 집안의 재산을 단 한 푼도 없이 모조리 날리고 마셨다. 만석꾼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우리 집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머님의 외가 쪽 도움을 얻어 겨우 3천 평 정도의 밭에서 농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십여 명의 소작농을 부리시던 아버님이 소작농으로.. 2008. 8. 18. 운동 못하면 남자취급 못 받는다??? 한국팀 16강에서 안타깝게 탈락하고 말았네요. 아쉽습니다. 제 옛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개다리 추억을 들려드리며 한국팀 위로드립니다. 초등학교 때 공 차다가 머리 깨진 적이 있습니다. 드리블해서 골대로 나가는데 두 명이 차례로 태클해왔습니다. 한명은 피했는데 두 번째 태클이 너무 깊숙이 들어와서 넘어졌죠. 그런데 돌부리가 있어서 머리 두 군데가 깨어졌습니다. 피가 홍건할 정도로 넘쳐 흘렀습니다. 저 안울었습니다. 원래 너무 크게 다치면 안웁니다. 그래도 그 다음부터는 왠지 공차기가 두렵더군요.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두려움 보다는 뒤떨어지는 운동신경에 문제가 있었다고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꽁무니로 뒤쳐져 달리는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죠. 일명 개다리였죠. 아시겠지만 남자들 공 못 차면 친구 .. 2008. 8. 11. 나쁜 의사와 명의 같은 의사 아이들이 아파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다른 분들에 비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좋더군요. 어머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의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요즘은 그나마 소아과 의사님들이 가장 친절한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이 너무 퉁명스럽고 불친절하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 주시더군요. 예전에 어머님이 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의사에게 지어준 약이 어떤 약인지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신경질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군요. "왜요. 알아서 뭐하게요. 아줌마가 의사할꺼예요?"라고요. 세상에, 어찌 이렇게 몰상식한 의사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의사들이 대부분입니다. 저도 병원에서 진.. 2008. 7. 29. 블로거여, 자서전 만들기에 도전해보자! 아내에게 자서전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웃었다^^생각만해도 쑥스러운가보다^^대단한 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서전으로 담을 내용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 쓰지 않은 적이 너무 오래됐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을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은 것이 너무 오래된 것은 아닐까.주부들이 그렇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주부가 잊으니 말이다.내 인생의 자서전을 써보자!학생들에게 강의할 때도 자서전을 써보라고 권유한다. 역시 쓸 내용이 많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성공했다는 경영자도 마찬가지다. 다들 힘들어한다.20대라면 20대로서의 고민,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 젊은이로서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생각, 나의 가족, 나의 사랑, 나의 열정, 나의 젊음, 나의 무용담.. 2008. 7. 25. 정직하면 손해본다는 말은 착각, 도덕성이 경쟁력이다! EBS에서 방영한 ‘도덕성’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일전에 보았던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5부작 방송을 재방송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용을 보고 충격적이었다. 마지막 무렵에는 내 인생의 마지막까지 떠올리며 울컥 눈물까지 고였다. 방송은 자정 가량이 되어 늦게 끝났다. 그런데도 아내와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도덕성’에 대해서,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이미지출처; EBS 다큐프라임 www.ebs.co.kr/homepage/docuprime) 사실 나는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다. 아내는 의외라고 말한다. 10여년간 지켜본 자신은 내가 누구보다 도덕적인 사람으로 보아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노력해온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내가 도덕적이지 못했.. 2008. 5. 14. 희생 없이 아름다운 것을 얻을 수 없다! 주말부부로 살아온 이야기! 요즘 사회가 복잡해지다보니 주말부부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주말부부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될까요? 안될까요? 지난 5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했습니다. 한 때 품었던 어리석은 욕심으로 거의 모든 재산을 다 날려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대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좋겠다고 생각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30대중반에 느끼는 삶의 절박함과 암울함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월드컵 시즌에는 마치 히로뽕을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죽고 싶은데도 월드컵 한국경기 볼 때 만큼은 지독한 희열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 기운이 사라지면 곧 다시 절망감으로 무너지는 느낌이 반복하곤 했었죠. '살아야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벌려놓은 일은 내가 해.. 2008. 4. 30. 이전 1 ··· 12 13 14 15 16 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