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아이가 백반증에 걸릴까 우려해 정관수술했던 형님.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으로 복원수술 고민...
형님은 자신의 ‘백반증’이라는 처지 탓에 결혼 자체를 포기했다.
하지만 비록 늦게나마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집안 식구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결혼식이 진행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작은 공장에 함께 취업했다. 공장에 딸린 방도 있어서, 그곳에서 근무도 하고, 야간 경비 업무도 할 겸해서 두 사람이 함께 지냈다. 덕분에 돈도 착실하게 모을 수 있었다. 제법 안정된 생활이 2년가량 지속되었다.
자동차 부품회사였다. 자동차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이라 생산이 못따라갈 정도였다. 주문량이 많이 늘자 공장 확장 작업이 필요했다. 형은 야간 근무를 할 경우 공장에 있는 방에서 낮에 잠을 잤다. 그런데 공장 확장공사가 시작되면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소음이 심해졌다.
견디다 못한 형은 공장 근처의 월세 방으로 나갔다. 덕분에 야간 수당도 받지 못하고, 추가로 월세까지 내야만 했다. 백반 때문에 회사 사람과 말다툼이 있었다. 형수를 왕따시키는 일부 직원들도 못마땅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업을 해보겠다고 필리핀으로 들어갔다. 교통편이 좋지 않은 만큼 봉고 차량으로 소형 버스 역할을 하면 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비싼 통관료를 내고 국내에서 끌고 다니던 16인승 봉고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외국인은 그런 사업을 할 수도 없었고, 필리핀 사람을 앉혀서 일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큰 손해를 입고 차량을 팔 수 밖에 없었다.
처갓집의 오빠의 소개로 쌀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마진(이윤)이 높지 않았다. 게다가 오빠가 다른 유통상 보다 오히려 더 높은 가격으로 자신에게 팔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일이 안정될 수 있도록 처가댁에 도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필리핀 처가댁에서는 한국에서 온 형님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이것저것 요구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잘 사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도움은 거의 못 받고, 도움만 줘야 될 처지였다.
형수는 10남매 가량이 되는 대가족이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형수는 입양아였다. 식모처럼 부려먹기 위해서 입양된 것이었다. 형님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더 불쌍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왔던 것이다. 속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오히려 잘 됐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불쌍하니 서로 위로하면서 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형수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별도로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형님 내외분은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일을 해보려고 여기저기 다녀보기도 했다. 1년간 많은 돈을 까먹으며 일자리를 찾아봤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미 형의 나이도 40대 초반을 넘었다.
또 다시 필리핀으로 들어갔다. 필리핀에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려고 했으나 여전히 잘 되질 않았다. 조그만 쌀가게를 다시 열고 형수는 그 일에 매달렸다. 형님이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형은 형수만 남겨두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공사장에 나갔지만 일이 힘들어서 오래 버티질 못했다. 나에게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형님만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형은 백반 때문에 결혼조차도 생각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도 혹시나 형님과 같이 백반증 있는 아이를 낳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제 둘째, 유진이 돌 잔치하던 날, 돌잡이 중인 여동생을 도와주려는 오빠 준영이, 사진은 사촌남동생 정현이가 촬영해 준 사진. 형님은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가능한 참석치 않으려고 했다. 결국 여러 사람이 모인 이 자리에도 참석치 못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결심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너무 걱정스러워 정관수술을 혼자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심이 들었던 것이다. 형수 역시 그렇고. 정관복원수술을 해야만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형님 혼자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 준영이 보니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관복원수술을 하면서 우리 집에 머물렀다. 주말부부를 하던 터라 아내에게나 어머니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머물렀지만 정관복원수술을 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주 민감한 수술이기에 포경수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아프다고 한다. 그런데 형은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백반증과는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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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형님 내외분을 필리핀에서나 한국에서 채용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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