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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여행기5)미켈란젤로가 평생토록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새기지 않았던 이유

by 따뜻한카리스마 2020. 4. 20.

바티칸의 모든 예술가를 압도하는 미켈란젤로, 그가 평생토록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새기지 않았던 이유

오늘은 바티칸 투어가 있는 날이어서 아침 일찍 서둘러 일어났습니다. 호텔 조식을 즐길 시간이 없어 각자 샌드위치를 하나씩 들고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는데요. 그렇게라도 챙겨먹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했답니다. 아침 일찍 시작한 바티칸 투어가 오후 4시 가량이나 되어서야 끝났기 때문인데요. 실제로 투어 하는 동안 어디서 무엇을 먹을 시간적 여유가 없고, 먹을 장소도 잘 없으니 바티칸 투어를 할 분들이라면 꼭 아침 식사를 잘 챙겨 드시길 바랍니다.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방에 챙겨두는 것도 요령인데요. 다만 바티칸시티는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라 어디서 앉아서 먹을 자리가 마땅찮으니 말 그대로 간단한 요기 거리를 준비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정말 쉴 틈 없이 계속해서 행군 형식으로 투어가 진행되기에 아침 든든히 챙겨먹고 간식이라도 중간중간 먹어둬야 체력이 방전되지 않지 싶습니다. 유진이 만보계를 보니 이날 바티칸에서만 만보계 숫자가 20,000이 훌쩍 넘을 정도였답니다. 호텔에서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까지의 걸은 거리도 포함했지만 이날 10km 넘게 걸었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거의 매일 10km 가량의 거리를 걸어 다녔는데요.

그래도 아이들이 생생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유럽여행을 하려면 기초체력훈련부터 단단히 해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꾸준하게 운동을 해둔 것이 도움 되었답니다.

 

바티칸 시국의 인구는 불과 1천여 명도 되지 않는데요. 매년 999명을 맞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작은 나라이지만 완벽한 독립국가입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1년 내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북적거리는 관광명소입니다. 땅 크기가 우리나라 여의도의 1/6 수준에 불과한 땅덩어리라고 하니 더 놀랍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는 이유도 교황이 여기에 계신 이유 때문도 있지만 수많은 로마문명의 유물이 이곳 바티칸에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곳 바티칸 박물관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의 대영박물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규모는 과히 세계 최고라고 해도 아니라고 하는데요. 이 거대한 시설에 꽉꽉 들어찬 문화유산과 유물들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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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시국(State of the Vatican City, 교황청)

이탈리아 로마의 티베레 강 서안에 있으며, 성 베드로 광장이 있는 남동쪽을 제외하고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티칸시티는 독자적인 통신체계, 은행, 화폐, 우체국, 라디오 방송국, 스위스인 수비대 등을 갖추고 있다. 1929년 라테란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통치권은 교황에게 있고, 교황은 행정·입법·사법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갖는다.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와 보르지아관에 있는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 라파엘의 방 등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출처: Daum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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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 많은 예술가들 중에서도 오직 미켈란젤로 한 사람의 일생에 깊은 존경심이 느껴졌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어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인물인데요. 그는 13세기에 가난하게 태어나고,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여섯 살 때부터는 보모의 손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모의 남편이 석공이라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끌과 정을 장난감처럼 여기며 사용하며 성장했다고 합니다. 재능이 뛰어나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1년가량 배웠으나 열세 살 무렵부터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떠나버립니다. 이후 피렌체의 실세인 메디치 가문이 세운 조각학교에 입학하며 그곳에서 로렌초 메디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조각에 전념했습니다.

 

 

유튜브로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rkmrOIx1LGw

그러다보니 20대인 나이에도 그의 조각작품은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그 자신도 그러한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24살의 젊은 나이에 피에타라는 조각을 만드는데요. 사람들이 자신을 칭송할 거라고 잔뜩 기대합니다. ‘피에타는 통상 성모 마리아가 돌아가신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작품을 말합니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 이외에도 기존에 여러 작품들이 많은데요.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기존의 그 어떤 피에타보다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자애어린 사랑을 잘 함축한 위대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피에타하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만 떠올릴 정도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측면의 어떤 방향에서 보더라도 아름답지만 하늘에서 아래로 바라볼 때 두 눈을 감은 예수님의 모습이 평온하게까지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밑에서 관람해야 하는 관람객들 입장에서는 그 표정이 보이기 않기에 왜 예수님의 표정이 보이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평론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피에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조각품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바쳐진 선물이기 때문에 그러했다는 겁니다. 기존의 성모 마리아는 아들을 잃어서 슬퍼하는 장면이었는데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이루고 하늘나라로 아들을 잃어서 슬퍼하는 모습은 맞지 않는다며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처럼 사랑이 넘치는 자애로운 표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은 그렇게 위대한 작품을 젊은 미켈란젤로라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겁니다. 어떻게 24살의 청년이 이런 감수성 넘치는 창조적 작품을 구현해낼 수 있겠느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던 거죠.

 

이에 실망한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이 작품을 관람을 하고 모두 돌아간 늦은 시각에 혼자 끌과 정을 가지고 들어가서 피에타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깁니다. “이제야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보겠지.”라고 뿌듯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부심도 잠시. 그는 곧 후회합니다.

평범한 자신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으로 하느님에게 바치는 작품을 망쳤다는 생각에 크게 후회를 합니다. 그 이후로 미켈란젤로는 그 어떤 작품에도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4년후 4미터 높이의 다비드 상(David, 다윗 )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놀라운 재능과 자부심과 장인정신을 가진 그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미켈란젤로는 인기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못생긴 얼굴에다 괴팍한 성격으로 사교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기록상으로 봤을 때 미켈란젤로는 89세로 오랫동안 장수하는데요.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의 연애도 못하고 인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모태솔로로서의 원조로 삶을 살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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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1475~1564)의 일생

미켈란젤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던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작업장을 드나들며 돌이 어떤 형상으로 바뀌는 과정을 즐겨 보곤 했다...(중략)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실세인 메디치 가문이 산마르코 성당 정원에 세운 조각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로렌초 메디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뿐 아니라 각 도시 공국 그리고 교황청의 지도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전범으로 삼는 고전주의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고, 앞 다투어 고전 조각이나 유물, 문헌 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연스럽게 메디치 가문이 모아놓은 고전 조각들의 아름다움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볼로냐, 시에나 등에서도 활동했지만 주무대는 단연코 피렌체와 로마였다. 스물다섯 남짓한 나이에 로마에서 피에타를 완성하면서 세간의 환호성을 자아낸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40년 동안 방치되었던 골칫덩어리 대리석으로 4미터 높이의 다윗 상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중략)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장식을 고집스럽게 명령했다...(중략)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이 고집스러운 주문이 자신을 시기한 라이벌 브라만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형 프레스코화 제작에 경험과 관심이 적은 자신으로 하여금 이 일을 기어이 맡게 해서 실패를 유도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브라만테에 대한 분노 탓에 미켈란젤로는 붓을 들었다. 그는 이를 갈며 누구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던 작품으로 브라만테를 비롯한 라이벌들의 콧대를 꺾어놓겠노라 결심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한 시대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천재들이 태어난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경쟁심이 완성한 것이다.

 

천장벽화를 완성한 후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이런저런 대작들을 완성하던 중 다시 로마로 불려가 시스티나 성당 제단 정면에 결국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역작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약 23년 동안 그는 브라만테를 이어 라파엘로까지 손을 댄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에 동원되어 돔 설계를 완성했고, 파르네제 가문의 저택과 파울리나 예배당,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이어진 계단 설계까지, 건축가로서도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기량을 과시했다. 고향인 피렌체에서 피렌체 드로잉아카데미 원장까지 맡았던 그는 1564년에 89세의 나이로 로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론다니니 피에타를 미완으로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출처: 도서 <바티칸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Daum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4XX4820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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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평생토록 자신의 작품에 헌신했는데요. 저 같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과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일에 매진했던 거죠. 생각해보면 우리 인류에게는 얼마나 큰 축복이었나 하는 생각에 깊은 감사함마저 느꼈습니다.

 

이와 반면에 라파엘로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화가였습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많은 스승을 두고 다양한 예술 기법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라파엘로는 자신의 작품에 다른 뛰어난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그들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모방작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내도록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끊이지 않으며 사랑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달리 부유하고,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말도 잘해서 인기가 좋은 핵인싸였다고 하는데요.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애를 많이 했는데요. 공식적으로 언급된 연애 횟수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얼마나 될까요? 맞춰보세요. 무려 마흔 두 번이라고 합니다. 연애라는 것이 두 사람만이 아는 속성상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요. 그래서 비공식적인 연애까지 포함한다면 최소한 100여회 이상 연애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인지 그는 37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해설사는 너무 많은 관계로 정력을 낭비해서 급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제가 강의할 때 청중들에게 이 두 사람의 인생스토리를 들려주고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내용이 너무 길어서 다음 편에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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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철상은...

인재개발연구소 대표로 대구대, 나사렛대 취업전담교수를 거쳐 대학, 기업, 기관 등 연간 200여 회 강연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진로백서>, <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아보카도 심리학> 등의 다수 도서를 집필했다. 대한민국의 진로방향을 제시하며 언론과 네티즌으로부터 젊은이들의 무릎팍도사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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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아보카도 심리학>, <대한민국 진로백서>,<서른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가슴 뛰는 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