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첫 직장, 첫 해고의 뼈아픈 경험
누구에게나 역경은 있다! 역경을 마주치는 태도가 운명을 가른다.
대학 졸업을 바로 코앞에 두고 가까스로 들어간 첫 직장, 지방 방송국.
내가 맡은 일은 주로 외신 뉴스를 번역하고 우리말로 기사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악필이라 가끔 나 자신이 번역해놓은 글도 못 알아볼 때가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려면 반드시 번역을 워드 작업으로 변환해야만 했다. 당시 독수리 타법이어서 번역하는 시간보다 워드로 변환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지만, 1년쯤 일하면서 독수리 타법에서도 벗어났다.
번역을 많이 하다 보니 학교 다닐 때에 비해 영어 실력도 제법 늘었다. 주로 외신 뉴스를 다뤘으므로 국제적인 감각도 생겼다. 국제적인 감각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과 더불어 다양한 분야의 정보와 지식까지 접할 수 있었다.
방송국에 들어온 지 두 달가량 되었을 즈음에 아나운서 한 명이 들어왔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왔다는 풍문이 들렸다. 이제 정식으로 방영될 첫 방송을 앞두고 있었다. 부서의 모든 인원이 세팅되자 일은 더 바쁘게 돌아갔다. 아나운서는 소위 명문 S대 출신이었다. 서울이 고향인데다가 음악까지 전공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낭랑하고 아름다웠다.
호기심 많고 말하기 좋아하는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아나운서로서 제격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드디어 첫 방송이 시작됐다. 어설프게 만들어놓은 듯했던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을 통해 나오자 감회가 남달랐다. 힘들게 산 정상에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꿈같던 방송국에서의 첫 주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 회의에서 감독이 말했다.
“오늘 녹화 후 아나운서 해고되니깐 그렇게 알라고.”
“네, 왜요?”
“목소리가 방송용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네. 그리고 위에서 그러
는데 좀 싹수가 없다나 뭐라나.”
“… ….”
그렇게 신입 아나운서의 해고 사실을 미리 알게 됐다. 하지만 녹화전이라 차마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녀는 녹화가 끝나고서야 해고 통보를 받았다. 부서 직원들에게 “저 오늘부로 그만두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안쓰러웠다. 아무리 신입 아나운서라고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는 해고 상황인지라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학생운동을 할 때의 열정이나 불타던 의협심이 내게 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부끄러웠다. 사실 내가 그렇게 따진다고 달라질 거 하나도 없겠다는 핑계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한편으로 정말 사회는 냉정한 곳임을 피부로 실감하였다.
다음 주 월요일에 새로운 아나운서가 바로 들어왔다.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송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직장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업무 노하우도 많이 쌓여서 그전만큼 오랜 시간 일할 필요가 없어졌다. 번역 속도나 기사 작성 속도, 편집 속도가 모두 빨라졌기 때문이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2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던 나는 1년이 지나자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하면서도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너무 편했다. 사실 편할 때 더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폭풍속의 고요’라는 말도 있듯이, 편하고 안락하다고 느껴질 때 예기치 못한 큰 사건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다행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출근 전에 수영도 하고 일본어 수업도 들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정식 기자 시험을 보기 위해서 퇴근 후 도서관으로 향했다. 말이 좋아 기자지 사실상 내 업무는 번역사나 마찬가지 역할이었다. 게다가 정식 직원이 아니라 외주 직원이기 때문에 나 역시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식 기자로서의 전환을 꿈꾸며 언론고시에 매달렸다.
MBC, KBS, SBS 등 중앙 방송과 더불어 중앙 일간지 신문기자 시험에도 차례로 응시했다. 하지만 다수 언론사 시험에 서류도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했다. 서류를 통과해도 필기시험에서 모두 낙방했다. 대학교 때 무수하게 입사 탈락하던 비참한 기분이 또다시 들었다. 지방 방송과 신문사에도 지원해봤지만 역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앞으로 내 미래가 해고된 아나운서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막막했다. 그때가 1997년 5월경이었는데, 내가 맡은 방송 프로그램의 광고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 프로그램인 외신 뉴스는 지방의 프라임 타임 뉴스로 광고가 매회 풀타임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프로그램뿐 아니라 방송국 전체 프로그램에 광고가 하나둘씩 줄어들어갔다. 광고국장이 해고되었다. 영업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고됐다. 여름이 되어도 광고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기만 했다. 이번에는 편성국장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러자 국장이 방송국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고는 프로덕션을 하나 설립했다는 풍문이 들렸다.
그해 9월, 풀타임으로 가득 차던 광고가 한두 개만 남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IMF였다. 방송국 직원들은 그제야 국가적 외환 위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방송이라는 것이 빠를 것 같지만 때로 그렇게 둔감하기도 하다.
경영진에서 여러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몇 주일 뒤 대대적인 조치가 단행됐다. 상당량의 방송 제작이 중단됐다. 방송은 돈이 많이 안 들어가는 영화나 재방송, 외주 프로그램 등으로 대체됐다. 직원들 중 40~50퍼센트에 가까운 인원이 구조조정 됐다. 남아 있던 정규직 직원들도 퇴직금을 모두 정산했다. 또한 일정 부분의 연봉이 동결되거나 삭감되기까지 됐다.
내가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도 중단하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외주 제작팀 전체가 10월 20일자로 해고 통지를 받았다. 통보받은 날로 채 보름도 안 남은 상황이었다.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해고 통보를 받은 날, 친구들이 방송국에 놀러 왔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에 친구들이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며 약속한 것을 내가 깜빡한 것이다. 친구들에게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럴 정신도 없었다.
친구들을 태우고 차를 몰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친구들은 내 사정도 모르고 “이랴, 이랴, 달려라, 달려. 빨리 달리란 말이야. 이 자식아”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마치 의식 세계가 정지된 듯 멍한 상태로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시내의 한 교차로에서 70, 80도에 가깝게 우회전을 하는데도 내 차량의 속도는 70킬로미터를 넘고 있었다. 속도를 미리 늦췄어야 했다. 그러나 속도를 잡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신호등이 노란불로 바뀌자 내 앞 차량이 급정거를 해버렸다. 나는 그 차가 그대로 신호를 통과할 것이라고 판단한 탓에 방어 운전을 하지 못했다. 보통 때라면 설령 앞차가 급정거를 하더라도 비켜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신 상태로는 무리였다. 쿵 하며 앞차를 들이받고 말았다.
다행히 앞뒤 차량의 사람들 모두 무사했다. 앞차는 여대생이 몰고 있었는데 운전 미숙으로 급정거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내 과실이 더 크기에 앞차 수리비까지 모두 지불했다. 내 차는 보닛을 비롯해서 거의 모조리 망가져버렸다. 중고차 한 대 값이 수리비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뒷좌석에 타고 있었던 친구들의 행동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친구들은 “어, 이 차로 못 가겠네. 네가 천천히 수습해라.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 우리는 가야겠다”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친한 친구들이었음에도…. 친구가 때로는 도움이 안 되기도 한다. 그래서 친한 친구지만 인생의 깊이 있는 미래를 나누기가 쉽지 않은 걸까. 그 친구들을 지금도 연락하고 만나는 것이 신기하다. 그렇기에 친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친구들은 그때의 사건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여하튼 그렇게 나 혼자 자동차 사고 처리를 했다. 그로부터 보름 뒤, 부서는 예정대로 폐쇄됐다. 부서 전원이 해고됐다. 물론 나 또한. 너무도 뼈아픈 해고 경험이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때의 경험이 나에게는 큰 교훈이 되었다. ‘다시는 힘이 없어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하는 다짐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었기에….
누구에게나 역경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는 역경이라는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참조문헌: <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 페이스북 코멘트:
나는 대학을 졸업 후 처음으로 다닌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IMF가 닥치며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비참했지만 지금은 행운이었음을 느낀다. 그때의 역경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 청춘들에게 문제와 역경이 사람을 키우니까 좌절하지 말라고 전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현재의 문제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 따뜻한 카리스마와 인맥맺기: 취업진로지도 강사 2013년 교육생 모집일정 : 자세히 보기 + 저서: <청춘의 진로나침반>,<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 <가슴 뛰는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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