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여느 20대와 마찬가지로 진로와 인생문제에 고민이 많은 24살 남자입니다.
아마 저 같은 케이스는 드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제 소개를 드릴께요. 전 모 대학교에서 디자인계통을 전공하고 있는 3학년 학생입니다. 저에겐 큰 고민거리가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동성애자 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선생님께서 어떤 편견을 가지고 미리 앞서 판단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 제가 동성애자임을 바란 적도 없으며,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전 제가 이렇게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 어렸을 적부터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는데 뭐랄까...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학창시절 따돌림을 당하거나 외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친한 아이들도 많았고, 여자아이들과도 잘 소통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남자아이들 여자아이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죠.
고등학교에 올라올 때 즈음하여, 전 제가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커다란 절망이 절 짓눌렀지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부모님이 아시면 날 사랑해 주실까 걱정스러워 하루하루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사춘기의 일시적 현상일 수도 있으니, 20대의 성년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하더군요. 그 검색기록을 지우고, 작은 희망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저에겐 고통이었고, 더불어 자기혐오감에 빠져 초기에는 하루하루 다음날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지요.
눈물로 밤을 지새워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는 않지요. 더불어 고등학교에 올라오며 진로 고민과 학업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친구들로부터,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까봐 두려워하며 언제나 밝은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어요.
전 그 당시 동네 화실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곳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겐 큰 진통제 역할을 했었지요.
그 후 미술학원 다니는 것도 재밌고, 예체능을 좋아했기 때문에 미대에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고등학교 3년을 공부도 즐겁게 하고 미술학원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렇게 하여, 미술대학으로는 좋은 대학의 디자인관련 전공으로 입학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제 성격자체가 외향적이거나, 에너지가 넘치지는 않는지라 활동적인 학교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면서 즐겁게 1년 반을 보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 배웠던 도자기수업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네요..
후에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 후,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이제 3학년 1학기가 막 시작된 시점인데요. 어찌된 일인지 학과 공부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과제는커녕 학교도 출석하지 않고, 여러 가지 걱정과 고민에 온몸이 마비가 된 것처럼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제 고민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전공과 저의 적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 디자인(그중에서도 시각, 광고쪽)을 전공하고 있지만, 저 스스로 예능계열에 적합한 소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소질은 반복된 학습과 단련을 통해 갈고 닦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제가 좋든 싫든 그쪽분야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몇 년을 뒹굴다보면 분위기를 파악하고 감각도 생기겠지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관련된 업무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 보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로 인하여 나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을까?'
수업을 따라가면서 누군가는 시키지도 않아도 창작물을 만들고 끊임없이 자기를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저 같은 경우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전 학점을 관리하기위해 '주어진 과제를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완수해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제 맘속에서 우러나와 창작활동을 하거나, 뭔가 작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니 적어도 예능계에서 길게 보고 살아남으려면 저 정도 열정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3학년이니 이제 졸업과 취업을 생각할 시기가 되니 이런 걱정이 갑작스럽게 다가와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데요. 이런 고민과 연계되어 더욱 저를 괴롭게 하는 것이 저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저는 이 땅에서 저를 속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회는 저에게 개인으로써, 어떤 한 남성으로써 지니고 유지해야할 어떤 '틀' 을 요구하지만, 저는 그것과 본질적으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괴롭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교육받고, 밥벌이를 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죽을 때까지 행복과 불행을 왔다 갔다 하며 씨름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삶이자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행복만 바랄 수는 없겠지요)
제가 생각하는 사람의 중요한 선택 중 두 가지가 바로 직업과 배우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성애자로써 그런 인간으로써 '평범'한 삶의 궤도를 벗어났다는 것이 저에겐 참 견디기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책도 보고, 저에 대해 생각해 본 결과, 22살~23살쯤 하여 이제는 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전보다는 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젠 오히려 저만을 두고 봤을 때는 오히려 제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축복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고, 못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다음의 과제는 바로 사회와 저의 관계였습니다. 사회는 저에게 거짓말하기를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보낼 혐오와 비웃음이 두렵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남자들과의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데요..(남자보다 여자가 대화하기가 편합니다.) 스포츠도 못하고, 자동차나 축구선수는 이름도 모르고, 담배도 안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화는 무척 좋아하죠.
상대방과 진솔한 대화를 하며 생각을 교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교에서는 전공 성격상 여자들이 많아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남자 들이 많은 곳에 가면 왠지 좀 소외된 것 같고 그렇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나의 진실을 알게 됐을 때, 가족들이 절 외면할까봐 두렵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도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일 때도 있고, 가슴속에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물을 들이부어도 메워지지 않는 독처럼요.
때로 저를 한없이 끌어내리는 어떤 힘을 느낍니다. 절대 부술 수 없는 벽이 머리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생활도 손에 안 잡히고, 무기력한 삶이 괴롭다보니 제가 무엇을 해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최근엔 자꾸 답답한 한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동성애에 대해 우호적인(또는 좀 더 오픈된) 국가로 이민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알아보니 캐나다가 그쪽으로 굉장히 선진국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차라리 간호대에 편입을 하거나 재입학하여 간호사로 경력을 쌓은 다음 부족직업군 이민신청으로 캐나다에 정착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저를 좀 더 알고 저를 사랑할 수 있고 난 후부터는 남들의 사랑에 목말라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랑은 받는 것 이상으로 주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아마도 그래서 간호사라는 직업에 더 끌렸나봅니다. 간호라는 일을 통해서, 자신을 희생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통해 불완전한 저의 삶이 좀 더 충만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아니면 스튜어드라는 새로운 길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튜어드는 직업 특성상 굉장히 게이들이 많다고 하네요. 그래서 좀 더 소속감을 느끼며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외항사 스튜어드가 되면 한국에서 벗어나 살 수 있으니 숨통이 트일 것 같습니다. 게이들은 성향 자체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를 추구하다보니,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환경에선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구요.(사람들은 저보고 굉장히 사근사근하고 부드럽다고 합니다. 영어를 좋아하여 틈틈이 공부하기도하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합니다. 앞으로 계속 공부해야겠지요.)
기존의 전공을 그대로 공부하여 커다란 성공을 한다고 해도 전혀 행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저에겐 단지 ‘내가 나 자체로 온전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너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그 어떤 성공도 저에겐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만 하여도,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고, 저를 사랑해주시는 부모님과, 곁에 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메울 수 없는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니까요.. 영혼이 바스러져 가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나의 운명을, 내가 당면한 이 과제를 헤쳐 나가지 않고 도망갈 생각만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아들로써, 또는 누군가의 친구로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훌훌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편한 사람은 없겠지만, 이민이나 해외에 거주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부모님을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행복과 부모님이 바라는 저의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걸 느낍니다.(아버지는 군인이십니다)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는 것이겠죠... 누군가 포기해야한다면 전 저의 행복을 택하고 싶습니다.
저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답을 요구하진 않겠습니다. 모든 것은 저의 선택이고 저의 책임이니까요. 다만 저보다 더 힘들게 사셨으니, 더 많은 것을 경험하여 더 많이 알고 계시다면 저에게 작은 빛이라도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고민이 참 많으시겠군요. 어떻기에 특수하다고 말씀하실까 했더니 역시 특수한 상황이 맞는군요. 다행인 것은 고민이 가볍지 않고 깊이 있다는 점에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성정체성도 진로선택 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임은 분명합니다. 결혼 역시 중대한 진로경로 과정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지지 받기 어려운 여건에서 그 모든 것을 한 개인이 감내하기도 어렵고 공개하기도 어려움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말해 누구보다 당당하게 사회적 입지를 구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무시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분야를 구축하면 일반적인 시각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때까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안 그랬다가는 사회인으로서 성장하기도 전에 심각한 감정적 손상이 지금보다 더 커질 테니까요. 물론 완전히 성공하기까지 늦출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해보입니다. 그래도 최소 몇 년은 필요하지 싶습니다.
저는 굳이 간호사나 스튜어드 쪽으로 전향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고 계신 디자인 계통으로 지식을 더 깊이 있게 파고들어 전문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도 입지를 구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상담 답변에서 개인이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을 개인 스스로 짊어지라고 말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나 친구도 중요하지만 분명 스스로의 삶과 행복도 중대한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정신분석학자 융은 미칠 정도로 혼란스러울 때에는 자신을 기만하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지금의 마음이 어렵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하거나 해외로 나간다고 해도 크게 뒤바뀔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어렵겠지만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소수 민족의 사람을 환영할 일은 더더욱 없을 테니까요.
일단 5,6년간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으면 합니다. 그 때까지는 좀 더 참고 인내하며 전문가로서의 역량과 경력 구축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성정체성이 바뀔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저렇게 연애도 해보시길 권합니다. 더불어 혹 해외에 나가더라도 부모님께도 효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러니 너무 걱정만 하며 시간을 소모하고 낭비하고 보다 정당한 권한을 가져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상황이 특수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부분의 이유로 커리어 구축을 게을리 하거나 소홀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안 그랬다가는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질 테니까요. 성정체성은 분명 큰 진로장벽입니다. 진로를 설계해나가는데 큰 장애물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름대로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장애를 극복하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장벽을 어떻게 제거해나갈지 깊이 고민하고 그 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힘써 기울였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더 굳건하게 삶의 자세와 태도를 바로 잡아 일어서야 할 겁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젊은이들의 무릎팍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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