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부모가 좋다는 표현도 많이 하지만 부모가 싫다는 표현도 많이 한다. 우리 아이들도 싫을 때는 ‘아빠 싫어, 아빠 미워, 아빠 나가’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좋다고 표현할 때는 한 없이 좋다고 표현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하늘만큼 우주만큼 사랑해’라고 낯간지러울 정도로 애정을 표현한다.
아이들은 똑같은 대상에게 왜 이렇게 극명한 차이를 느끼는 것일까. 아이들은 똑같은 대상을 똑같이 느끼지 않는다. 좋은 아빠와 나쁜 아빠가 별도로 구분되어 있다고 본다. 나에게 큰 소리를 치거나 혼내는 아빠는 나쁜 아빠다. 이런 아빠는 싫고 밉다.
반면에 동화책을 잘 읽어주고, 놀이터에서 잘 놀아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아빠는 좋은 아빠다. 이 두 개의 대상이 같은 존재임에도 아이들은 서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대상을 두고도 극도로 다른 표현을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아이들 동화책에 그토록 많은 계모와 계부가 등장하는 이유다. 콩쥐의 엄마, 심청의 엄마, 백설공주의 왕비, 신데렐라의 엄마,,,등 모두다 계모다.
계모인 만큼 마음껏 욕을 해도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두 친엄마나 친아빠라면 어떻게 될까. 친부모를 그토록 싫다고 말하는 주인공 아이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니 심지어 엄마나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아이라면 독자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글을 읽는 독자는 큰 부담을 떠안게 되고,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TV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에서도 이런 유형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출생의 비밀이다. 알고 보니 내가 가난하고 볼 품 없는 집안의 딸의 아니라 아주 존경받고 부유한 집안의 딸(또는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식의 스토리다.
이렇게 뻔 한 소재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무의식에 남아 있던 욕망(내가 살고 있는 현재 집안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집안에 태어났더라면 하는 욕심)이 분출된 탓이다.
만일 동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면 어떻게 될까.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엄마나 아빠가 계모나 계부라면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그토록 많은 동화책과 많은 드라마에 계부와 계모가 등장하는 이유다.
유아기나 어린 시절의 아이는 엄마나 아빠가 완벽한 존재라고 믿는다. 부모는 못해낼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슈퍼 울트라 초특급 인간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조금씩 성장하면서 엄마나 아빠도 모자람이 있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좋은 아빠, 나쁜 아빠도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만일 유아기처럼 하나의 객체를 두세 개의 존재로 분리한다면 대인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자신의 자아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의 자아와 이상의 자아를 하나의 자아로 통합해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흠집과 어리석음과 부족함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 큰일도 해낼 수 있는 위대함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이 글은 도서 <심리학 테라피>를 참조해서 제 생각을 덧붙인 글입니다. 이와 같이 재미있는 우리 주변의 심리학 이야기는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를 통해 더 많이 보실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