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복학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제대로 시작해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공부가 어디 하루아침에 되겠는가?
전공이 영어였지만,
나의 수준은 정말 엉망이었다...
외국인의 말 한마디
못 알아듣던 형편없던 영어실력
신입생 때는 영어회화시간에 주로 장난치고 놀았다. 한 번은 떠들고 있는 나를 보고 외국인 강사가 나가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의미를 이야기해 줘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래서 영어로 사과를 한다는 것이 연신 “I'm sorry, I'm sorry,,,"를 반복하는 형편없는 영어실력이었다.
(이미지출처: 중앙일보07년12월7일자 인터넷전화 학습도구로 진화하다)
외국인 영어강사 수업 모두 수강하다
복학 후 다른 무엇보다 ‘영어 공부를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이 영어인데 영어 포기하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책만 붙들고 있는 것 보다는 실용영어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복학전 학원에서 2개월간의 초급회화 과정을 들었다. 복학 후에는 외국인 강사 수업이란 수업은 모두 다 수강했다. 수강범위가 넘어 정식 수강이 안 되는 과목은 외국인 강사의 양해를 얻어 청강으로 참석하였다.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자주 어울려 다니다
그렇게 외국인 강사들과 친목을 다졌다. 아버지와 같은 느낌이 들던 50대의 비셀(Bissel)이라는 강사와 친했다. 그리고 당시 나보다 한살이 많던 엘렌(Ellen)이라는 미국인 여자강사와 특히 친했다. 비셀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맛이 나는 강사로 정말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줘서 인간에 대한 감성과 따뜻함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같이 다니기에는 엘렌이 좋았다. 여자여서 그랬을까. 여하튼 수업 시간 뿐 아니라 주말 시간까지 엘렌에게 모든 시간을 배려했다. 거의 매주말 함께 돌아다니며 관광지 구경도 하고 4시간씩의 시내 쇼핑도 밥 먹듯이 했다.
대기업 입사에 부푼 꿈으로 시작된 4학년 2학기
어느 듯 4학년 2학기가 되었다. 취업 시즌이었다. 1학기에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중소기업이라 원서를 내지는 않았다. 2학기 개강하면서 대기업으로 향한 꿈이 부풀어 올랐다. 주제 파악도 못하는 터무니없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그땐 다들 그랬다. 지금보다 훨씬 입사조건이 쉬웠다.
그러나 서류통과도 못하고 번번이 입사탈락의 고배를 마시다
그렇게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모두 원서를 내었건만 줄줄이 탈락했다. 대부분 서류도 통과하지 못했다. 나야 토익점수도 낮고 학점도 낮아서 그렇다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 자체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탈락 횟수가 십여 회가 넘게 되자 나도 마음이 촉박해졌다.
(이미지: 이력서 샘플, 사실은 잘못된 이력서 양식임, 입사지원서 내는 쪽쪽 탈락했다!)
소위 스펙 좋은 여자후배도 줄줄이 서류 탈락
그런 와중에 아주 뛰어난 여자 후배 하나가 있었다. 이 친구 학점 4.3에 토익 965에 영어웅변대회 1위 입상 경험에 발음도 아주 좋고 성격도 활달하고 아주 적극적인 여자 후배였다. 그런데 이 후배도 나와 같이 번번이 대기업 문턱에서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지방대의 차별이었다.
“선배, 나 벌써 10번이나 탈락한 것 같아. 서류한번 통과 못했어. 어떻게 서류한번 통과 못하는지,,,지방대 차별이 너무 심한 것 같아”, 달리 내가 위로해줄 말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이상으로 탈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백여회 떨어지면서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선배였기에 나는 위로의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잘 될 거야, 기다려보자…….” 몇 번의 취업고베가 이어졌다. 어느새 12월로 접어들었다. 초조했다. 그 때쯤 후배는 00그룹에 채용이 확정되었다. 나도 번번이 탈락하고만 있어서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거의 2백여 회 이상 탈락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양치기 소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존심 탓에 000그룹 공채 면접에서 탈락되었지만 합격했다고 모두에게 거짓말을 했다. 당락을 물어보는 모든 사람에게 그냥 합격했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심지어는 부모님에게도 합격했다고 이야기했다.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도 자기암시를 걸었다.
외국인 강사들과 돌아다닌 덕분에 영어 잘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그룹 공채에 채용되면 보통 다음해 2월경에 입사를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2월 전까지 반드시 취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안 그러면 거짓말도 탄로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000방송국에서 외국어 능통자를 찾는다고 취업보도실로부터 추천요청이 들어왔다. 외국어 능통자 3명을 추천해달라고 요청 왔으나 내 수준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추천받을 수 있었다. 외국인 강사들과 부지런히 같이 다닌 덕택에 내가 영어가 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방송국 취업 추천을 받아,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하다
그래서 운 좋게 졸업 전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즘 계속해서 미끄러지던 여자 후배도 모그룹에 채용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 방송국 일에 매력을 느끼고 같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후배야 실력이 좋았으므로 당연이 최상위 추천이었다. 같이 일하게 된 이 후배는 ‘선배, 우리 재미삼아 일 해보다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만두고 서울로 연수받으러 가자~’ 이러는 것이었다. 12월이었으니 연수하는 2월까지는 2개월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는 나도 모 그룹으로 채용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합격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되돌아 갈 길도 없었다. 무조건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응, 그러자’라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침7시에 출근해서 새벽1시에 일이 끝나는 강행군, 그래도 되돌아갈 수는 없어...
그렇게 시작된 첫 직장 일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새벽1시경에 끝나고, 3일에 1번씩은 밤샘해야 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결국 후배는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두었다. ‘나도 그만둘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물러날 길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첫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내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그리고자 내 인생의 자전적 이야기를 기록해둔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 취업 정말 어렵다. 내가 봐도 열심히 하는데 취업문이 꽉 막힌 것을 보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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