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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번 직업을 바꾼 남자

버려진 버스에서 살았던 내 어린시절의 추억

by 따뜻한카리스마 2008. 8. 18.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아버님은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작은 동네였지만 꽤나 재산이 있으셨다 하신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거의 한 번도 넉넉한 형편으로 살았던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10여 년간이 넘는 직업 군인 생활을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월남전에서 불명예로 제대하게 되었다.

억울하다고 통곡만 하시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셨다. 결국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셨고 사업을 하셨다. 하시는 일마다 쪽쪽 망했다. 결국 만석꾼을 넘던 집안의 재산을 단 한 푼도 없이 모조리 날리고 마셨다.

만석꾼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우리 집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머님의 외가 쪽 도움을 얻어 겨우 3천 평 정도의 밭에서 농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십여 명의 소작농을 부리시던 아버님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신 것이다. 집 한 채 없이.

집이 없었던 부모님은 버려진 버스를 구했다. 버스 안의 의자를 들어내고 그곳에서 살림을 살았다. 초라한 그 집이 싫었다.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가난했던 마을을 벗어났던 중학교 3학년까지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단지 한 두 명의 친구 정도만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 아이들은 우리 집을 신기해했다. 엄밀히 말하면 버스집(우리 집을 다들 ‘버스집’이라 불렀다)에 놀러온 것이 아니라 원두막으로 놀러온 것이었다. 아이들 놀이터로서는 수박 농사를 위해 지어놓았던 원두막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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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미애의 버스집-http://blog.naver.com/zandy3,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사는 한국 패션 모델이 너무도 턱없이 비싼 한국에 집을 못구해 버스로 마련한 버스집, 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훨씬 낭만적이고 현대적이다. 우리집은 말 그대로 고철덩어리였다.)

버려진 버스 안에서 살았는데, 다들 우리 집을 ‘버스집’이라 불렀다

여하튼 가난했다. 어린 나로서는 사실 그런 가난조차도 잘 몰랐다. 사실 절박함도 없었다. 그런 것을 느낄 철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싫은 것은 비오는 날이었다. 장마철이 되면 밤새 내린 빗물로 버스에 물이 가득 고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온 집안 식구들이 새벽녘에 깨어나  바가지를 들고 빗물을 들어내야만 했다.

비만 내리면 물이 새던 우리 집

사실 그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비가 그쳐도 진흙뻘이 마르지 않는 것이었다. 여름도 문제지만 겨울이 되면 거의 보름 이상씩 땅이 질퍽했다. 그래서 집을 나서자마자 나의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친구들이 볼까봐 부끄러웠다. 그래서 학교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물이 있는 고여 있는 곳에는 무조건 신발을 씻었다.

하지만 온통 신발에 가득 묻힌 진흙이 물 몇 방울로 씻길 리는 만무했다. 학교 오는 사이 어느새 진흙이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 혼자만 잔뜩 흙을 묻히고 교실을 다니는 것 같아서 이동을 하지 못하고 책상 안에 다리를 오므리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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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미애의 버스집 내부 화면과 이 버스로 나선 유럽 여행의 한 장면, 나도 어린 시절 꿈에 우리 집 버스를 타고 날아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부모는 설 땅을 잃어 쫓겨나는데도, 농촌을 벗어난 것만으로 즐거워하던 철없던 나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3000여 평의 밭이 팔렸다. 바로 옆에 도시고속도로가 뚫리면서 3천만 원가량 하던 밭이 30배가량 올라서 9억 원에 팔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10여 년간 그 곳에 살았다. 하지만 단돈 3백만 원만 받고 우리 가족은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그 땅을 벗어나야만 했다. (현재 그 외가쪽 친척은 100억대 이상의 천만장자가 되었다. 솔직히 배가 아픈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친척으로서 부모님이 서운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던 땅은 30배가 뛰어 9억에 팔렸으나 ,우리 가족은 3백만원에 쫓겨나야만 했다

부모님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철없던 난 그런 절박한 사정을 잘 몰랐다. 단지 그 진흙뻘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비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이후로는 비 맞는 것도 좋아했고 비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단칸방에서라도 생계를 유지하려던 어머니

우리 가족은 300만원의 돈으로 부산 동래 복천동이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산 아래 언덕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지역이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바뀌었지만. 그 곳에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서 만화방을 차렸다. 버스 집보다 더 작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마냥 좋았다.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진흙탕을 벗어나서 좋았고 만화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부모님은 집안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집안일에 손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로 인해서 그만큼 더 삶에 대한 절박함을 빨리 깨닫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그렇게 내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가난의 배고픔으로 채워졌다.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제대로 이야기 한 번 못했던 내 어린 시절

그래서 짠돌이처럼 쓰진 않더라도 아껴 쓰는 것이 알게 모르게 몸에 배어 있었다. 대학 시절에 친구 한 명이 ‘밥을 사라’고 강요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물론 내가 사줄 수도 있었겠지만, 나 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친구니깐 나보고 그 친구 밥을 사라는 것이었다.

전혀 이유가 타당치 않은 것 같아서 거절했다. 나 보고 ‘너는 잘 살지 않으냐?’하는 것이었다. 하긴 내가 귀티가 나긴하지만...^^ 당시에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티격태격 말싸움이 오가던 중에 어렵게 성장해온 내 이야기를 짧게 해줬다. 그랬더니 친구는 ‘미안하다, 내가 오해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라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내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전적 이야기를 써보고 있다.
내 블로그(www.careernote.co.kr)에 계속해서 담아내 볼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당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어떨까?
나에게 들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댓글에 대한 댓글:
오전에 일상적으로 올렸던 제 경험의 글입니다.

외부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다음 메인에 노출되며, 폭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주셨네요.
그런데 제 글에 화가 나신 분들도 많군요. 너무 마음상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댓글에 어떻게 일일이 대응해야될지 몰라서 댓글에 대한 댓글로 글을 남깁니다.

'나도 한 번 자서전을 써보자'라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주제에 무슨 자서전을 쓰겠습니까. 그냥 순수하게 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 그래서 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쓴 글입니다. 앞으로도 제 인생에서 느끼고 깨달은 삶의 이야기들을 최대한 진솔하게 펼쳐 나갈 요량으로 쓴 것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저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기록을 남겨야 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펜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부디 너무 마음 상해 하지 마시고, 마음 편하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저 정말 그 친척 분 서운해하는 마음 조금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려웠던 시절로 인해 지금의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보상에 대한 부분은 다 커서 어머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머님 역시 그 일에 대해 서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던 당시로서 마음은 아프시지 않으셨을까 추측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다만 아버님이 당시에 상당히 서운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농사를 시작하면서 아버님 명의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소작농이라는 표현을 써서 그렇지 일반적인 지주와 소작농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거의 쓸모 없던 땅 덩어리였죠. 또 한편으로 아버지로서는 무엇보다도 집안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서 그 땅에서 나오게되면 그 다음에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보니 원통해하셔서 당시에 분통을 터트리신 것 같습니다.

여하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어르신끼리는 계모임을 통해서 만나며 교류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악플이 많아서 제목은 변경했습니다. 원래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라고 할려고 했으나 그렇게해서는 주목받을 수 없어서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선정한 것 같습니다. 넓은 이해를 부탁 드립니다.

따뜻한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일일이 인사를 드릴려고 하오나 혹시나 못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여기서 감사 인사를 먼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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