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머니의 일흔세 번째 생신!
‘어머니가 나를 대하듯 나도 다른 사람을 대하며 살아가자’ 마음먹은 날.
가족들과 조촐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장어구이를 먹었다. 어렸을 때 짚불에 구워먹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잘 안 먹던 우리 아이들도 오늘은 비교적 잘 먹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어머니 생신을 맞아 어머니에 대한 소회를 떠올려 본다. 어머니는 또래 분들처럼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지 않고 양력으로 지내는 신식 할머니다. 비교적 부유한 외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해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던 분이었다. 그러나 친할머니가 돌아가자 외할아버지가 기가 쎈 새 어머니를 들이고, 외할아버지 사업까지 망하고, 가세까지 기울며 형편이 조금씩 힘들어졌다. 그래도 당시 사람들에 비해서는 괜찮은 형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만나면서 어머니의 본격적인 고생은 시작되었다.
아버지 고향인 함양의 시골 생활도 힘들었지만 아버지가 있던 재산까지 모두 다 날리고 제대로 된 사회생활마저 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거의 한 번도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푸념을 해볼 수도 있건만 그런 푸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괜스레 아들에게 고민을 주기 싫었던 것이리라.
어머니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둔한 불효자식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무덤덤하게 지내기도 했다. 사실 어머니는 어머니 나이에 비해 10년은 젊어 보인다. 정말 고귀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고 평소에도 화나 역정을 내는 경우가 없는 유순한 분이다.
어린 시절의 부족한 나를 보고 꾸지람도 많이 할 수 있었건만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물론 자잘한 잔소리들이야 간혹 있었지만 모두 다 나를 위한 말들이었다. 나에 대한 사랑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뻔하게 학교생활을 잘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도 늘 ‘잘하고 있다’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셨다.
‘앞으로 더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무엇이든 잘해낼 사람이라고.’ 사실 그런 말도 살갑게 하는 분도 아니었다. 내가 볼 때 그랬다는 것이다. 사실 그 이상으로 나에 대한 믿음이 있는 분이었다. 어머니가 절대적으로 나를 믿으니 어떻게 내가 나를 믿지 않겠는가. 열등감 덩어리였던 내 마음 깊숙한 곳에 흔들리지 않을 자존심의 뿌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때로 내 마음이 흔들려도 언제든 오뚝이처럼 나를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긍정성과 자존감.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온 선물이었다.
그런 귀하디귀한 어머니 생신에 불효자식은 그저 그런 평범한 생일 카드와 돈봉투로 생일을 대신했다. 케이크도 싫어하셔서 하지 않았다. 편지라도 손 글씨로 적어야 하나 워낙 악필이라 워드로 작성해서 어머니께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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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머니가 벌써 일흔 셋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늘 오래도록 건강하게 우리 가족들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준영이가 그러더라고요. ‘아빠 엄마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유진이도 없었을 것이라고.’ 어머니가 없었다면 저도 우리 준영이, 유진이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어머니가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족하고 모자란 저를 보고도 늘 ‘잘하고 있다’고 믿으며 무한하게 사랑해주시고 신뢰해주신 덕분에 제 마음 속에 깊은 자존감(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장해서는 제가 사회생활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우리 준영이와 유진이까지 돌봐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착하고 바른 심성으로 성장하고 있어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몸이 아프셔도 내색하지 않고 도와주시는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감사의 표현도 못하고 살아가는 이 불효자식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모자란 면이 많으나 어머니가 주신 사랑과 지혜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지혜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족도 바르고 행복하게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사회에서도 올바른 재목으로서, 올바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어머니, 늘 건강 잘 챙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삶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함께해주셔서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 철상이가
2014년 12월 16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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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다 퍼주는 사람’일 것이다. 그만큼 많은 것을 받았다. 어머니는 ‘순둥이’라는 별명이 붙어도 좋을 정도로 순한 분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말수가 적고, 타인을 험담하는 말은 거의 입에 떠올리지 않는 그런 분이었다. 그렇게 순하디 순한 어머님이 고등학교 때 내 호랑이 담선생님을 물 먹인(?) 기억이 떠오른다.
일전에 내 자전적 에세이 <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를 준비하면서 과거의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돌아보다가 떠오른 사건이었다. 당시 내 글은 평범하다고 해서 수십 군데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해서 빛을 보지 못했다. 아쉬웠지만 나 자신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꾸준하게 글을 쓰고 내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 5년에 지나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5,6권 이상의 책을 써왔다. 그 중에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는 여러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나름대로 베스트셀러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 못하던 열등생이었고, 젊은 날의 불안한 직장인이었지만 기업의 전문경영인까지 거쳤다. 대학교 강단에 오르는 교수도 되었다. 심지어 수백여 차례 방송에 출연하고 올해에는 2개의 고정 방송까지 맡고 있다. 취업진로 강사협회를 설립하고, 강연기업을 설립하고, 자신의 교육프로그램까지 개발해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부쩍 성장한 나 자신을 보면서 가끔씩은 나조차 놀래곤 한다. 그러면서 부족한 내가 이 만큼이라도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나에 대한 ‘어머니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가장 큰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성이 조용하고 기품이 있으면서도 여성적이었던 어머니. 어찌 보면 나약해 보이는 보통의 어머니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순하디 순해 보이기만 하는 그런 평범한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담대한 용기와 기개가 있는 분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내 기억에 떠오르는 사건 하나를 들려주고 싶다. 고등학교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미팅이라는 것을 하게 되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 일부 기억은 잊어져버렸지만 아마도 무척 초조하고 긴장되고 설레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날 소개를 주선한 내 친구가 여자들이 나오자 담배를 물었다+_+
요즘이야 고등학생이 담배 피우는 일이 흔한 일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소위 노는(?)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조금 놀랬다.
자리에 앉아 어쩔 줄 모르고 긴장하고 있던 나는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야, 나도 한대줘~”라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뭐야, 너 담배 안 피우잖아~”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냐, 나도 펴, 오늘 담배 안가지고 왔어, 한대줘~”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냥 지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친구한테 지기 싫었고, 누군가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너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_-;;;
이렇게 내 흡연은 20여년 가량 지속되었다. 밖에서 담배 필 때야 비교적 마음대로 피긴 하였지만 학교에서야 마음대로 필수가 없어서 주로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던 시절이었다. 단속하는 선생님들을 피하기 위해서 주로 망을 보는 친구 한명을 두고 돌아가면서 담배를 피우고 선생님이 근처에 오면 모두 나와 버려서 교묘히 단속을 피하곤 하였다.
주로 3학년 화장실에서만 단속을 나오기 때문에 가끔 1학년 화장실에서 담배를 마음껏 즐기기도 하였다. 운 좋게 3학년이 되어서까지 한 번도 단속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1학년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학생주임이던 담임선생님이 급습해서 화장실에서 현장범으로 걸렸다. 정말 안 죽을 만큼 실컷 얻어맞았다. 몽둥이로 얻어맞아서 부은 자국이 손두께보다 더 클 정도였다.
당시에 육체적으로야 튼튼하던 시절이었기에 맞으면서도 아픈 것 보다는 부모님께 알려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두려움이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실컷 때리고 난 선생님은 “내일, 부모님 모시고 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렵게 어렵게 겨우 겨우 살아가는 어머니에게 나까지 걱정을 안겨드리는 것이 미안하고 송구스러웠다. 또 한편으로 불같은 아버지에게 어떤 화를 당할까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마음은 불안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초조한 저녁이었다. 부모님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까지도 망설이다가 어머니에게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어무이, 샘이 함 보자카던데...”
들릴락 말락 한 모기목소리로 대충 그렇게 중얼거리듯 이야기하고 집을 나섰다. ‘오시면 오시고, 못 오시면 바빠서 못 오시는 것으로 선생님께 대답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학교를 향했다.
그 날 어머니는 중얼거리듯 던진 아들의 말에 “그래, 고3이 되었는데도 한 번도 못 가봤네, 가봐야지”하고 마음먹고 '오늘은 학교로 한 번 가봐야겠다.'하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교무실에 온 어머니는 선생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먼저 들었다. 아마도 큰 충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여하튼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 선생님 앞에 불려가 엄청 꾸지람을 들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충 “너, 이xx, 고3이 되가지고 공부안하고 어쩌려고 그러냐. 그래가지고는 공돌이 된다. 공돌이.”라는 식으로 다소 거칠게 꾸지람했지 싶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라는 선생님의 따뜻한 돌직구였는지도 모른다.
내 옆에 있는 어머니에게 그런 말들을 들으니 너무 송구하고 죄스러웠다. 시간이 멈춰진 듯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 내게는 억겁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내 손길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곤 “가자!”하고 짧게 말했다. 선생님 눈이 순간 휘둥그레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 갑작스런 어머니의 제의에 놀라기도 했지만, 순간적으로 어머니의 의도를 눈치 채고는 한편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이 어머니에게는 뭐라고 말을 못하고 내게 말했다. '너, 임마. 거기 못 서.'라고 말하며 몇 마디를 더 던졌다.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내 손을 이끌었다. 그렇게 교무실을 벗어나고, 학교를 나섰다. ‘앗싸’하는 소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그런데 어머니는 집으로 가는 동안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아무 말씀도 없이 계속해서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두려웠다.
집에 도달할 즈음에 “아버지한테는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 담부터는 그러지 마라~”고 한마디 하셨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말을 건네주어서가 아니라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겠다는 말씀에 안도를 한 것 같다. 그 만큼 철부지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면 잘 들어주고, 반박 의견도 잘 못 내는 어머니가 어떻게 선생님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다.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자식이 한 행동이 비록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내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보여주신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들을 온실에서 키우듯 감싸듯 하시는 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날 보여준 어머니의 모습은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되었다. 대개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내가 무엇을 하던 나를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해주었다.
그 크신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에 담고 늘 담대하게 살려고 용기 있게 살아왔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은 나를 키워준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도 거의 매일 하루에 한통씩 안부전화를 드리곤 했다. 어머니는 나의 사회적 활동도 좋아하지만 잊지 않고 매일 전화 드리는 행동에 더 기뻐했다. 주변 분들에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들이 전화한다는 자랑을 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기 때문이다.
7,8년 전에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소장님을 세미나에서 만났다. 그가 이야기하는 ‘mother마케팅’이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근거해서 주고도 또 퍼주는 우리들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어머니가 나를 대하듯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였는가에 대해서 문득문득 반성하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 대하는 내 자세가 달라진다. 가족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전한다면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회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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