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격동의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부모의 영향
피터 페르디난드 드러커(Peter F. Drucker)는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부친 아돌프는 오스트리아의 재무성 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모친 캐롤라인은 오스트리아에서 최초로 의학을 공부한 여성으로서, 특히 프로이트의 제자였다고 한다. 드러커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관자의 모험》(1979)에서, 그는 자신의 집안 형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확실히 1920년대 중엽의 빈의 기준에 비추어서 말하면, 우리집은 아주 부유했다." 10세가 되던 1919년,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 드러커는 빈 김나지엄(Vienna Gymnasium) 에 입학했다.
드러커가 5세가 되던 해인 1914년 7월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 포고하자 전 유럽이 전쟁에 휘말려 들었고, 나중에 일본과 터키마저 참전함에 따라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제1차 세계대전은 드러커가 9세가 되던 해인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종전을 맞는다. 그 결과 당시 인구 6천만명 규모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고 오스트리아는 지금과 같이 스위스 산록의 소규모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1910년대 (1910∼1919년)는 20세기 역사의 호수이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세 개 꼽으라면 제1차 세계대전과 볼셰비키혁명 그리고 포드자동차의 컨베어 벨트 시스템 도입을 들수 있다. [전쟁 시대], [혁명 시대], [대량생산 시대]라는 20세기 역사의 특징들은 모두 1910년대의 호수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르네상스와 시민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19세기까지 엘리트들이 발전시켜 온 고상한 가치들이 먼지처럼 날아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무자비한 민간인 살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가스 사용조차 주저하지 않은 것이 세기가 바뀌는 20세기 초 저질 싸움꾼의 모습이었다.
전쟁이 이처럼 야수성을 더하게 된 데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른 대량생산 시스템의 출현도 한몫을 했다.
예를 들면, 19세기 전쟁에서 프랑스는 하루 1만여발의 포탄이면 충분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들어 하루 20만발을 사용해도 모자라게 됐다.
할머니와 음악
드거커를 르네상스적 인물로 키운 사람은, 특히 음악과 교육 그리고 사회생활에서의 예의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할머니였다.
드러커의 할아버지는 요즈음 말로 바람둥이였는지, 할아버지가 어떤 젊은 여인과 같이 있는 장면을 누군가가 말해 주면, 할머니는 "그 여자가 누구든 간에 할아버지가 사건을 일으킨 최후의 여자는 아닐거야" 라고 했다고 한다.
드러커에 따르면, 젊은시절 조모는 피아니스트였다.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96)의 제자로서 스승의 요청에 따라 몇 번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를 위하여 피아노를 친 것이 생애를 통해 최대의 자랑스런 추억거리였다.
물론 당시는 양가의 자녀가 공개 연주가가 된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이 타계하고 그녀 자신이 병상에 눕기 이전에는 자주 자선음악회에서 연주했다.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지휘하에 연주한 적도 있다고 한다.
드러커의 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간혹 식당에 가곤 했는데, 만약 웨이트레스가 친절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꾸중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의 일을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고객을 접대하는 웨이트레스는 끝내는 불행해질 것이 뻔하다. 그녀에게 무리하게라도 예의범절을 습득시키는 것은 고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단다."
드러커는 할머니에게 피아노와 음악을 배웠고 당시 유명했던 아르투르 슈나벨(Arthur Schnabel, 1882∼1951)의 지도도 받았다고 한다.
필자는 《미래의 결단》(1995) 역자 서문에 "드러커의 책의 구성은 그랜드 오페라의 악보와 같다"고 쓴적이 있는데, 지나친 추측이 될런지 모르겠으나, 드러커의 논문과 책의 구성은 어릴 때 받은 음악교육에 큰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생각된다.
조지프 슘페터
드러커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부모와 교사들 외에 오스트리아의 관리였던 부친과 교분을 맺고 있던, 그리고 드러커의 자택을 자주 방문했던, 또다른 많은 오스트리아 관리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가 있었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는 보호무역을 국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무역성은 공공연히 자유무역을 주장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본질적으로는 농업국가였으므로 (요즈음의 농업국가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그러나 외국무역성은 공업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드러커의 집에 자주 들렀던 재무성의 관리 헤르만 슈바르츠발츠 박사(별명 햄)는 결국 오스트리아의 재앙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21년 여름, 오스트리아의 화폐 크로네는 제1차 세계대전 전보다 그 가치가 1천분의 1로 하락했다. 6개월 후에 크로네가 전전 대비 1만분의 1로 가치가 떨어지자 그는 책임을 지고 관직을 떠났는데, 헴의 후계자도 그와 마찬가지로 대실패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제일의, 뿐만 아니라 아마도 유럽 제일의 경제학자이기도 했던 조지프 슘페터가 그 후임이었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여전히 사회주의자의 지배하에 있었고 공공지출의 삭감이 승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슘페터 또한 1년 후에 각료직을 사임했다.
그는 그후에 본대학에 봉직했고, 1929년에는 하버드대학으로 옮겼다.
1922년 그가 사임할 무렵에는 1914년에 1크로네로 살 수 있었던 것이, 1918년 봄에도 대체로 같은 값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실로 7만5천크로네를 요할 만큼 크로네는 값이 떨어지고 있었다.
슘페터는 인플레 억제는 경제이론이나 경제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상의 결단의 문제라는 확신을 가진채, 또한 자유세계에서 과연 정치상 필요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의문을 품은 채 사임했다.
슘페터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6)에서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상의 의사결정 능력의 결여로 말미암아 인플레의 억제내지는 정지에 실패하여 붕괴할 것을 예언했다.
슘페터의 이런 관점은 드러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그 결과 드러커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등) 여러 곳에서 케인스류의 [경제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출처; 대구대 경영학과 이재규박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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