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부분의 상담에서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개인 스스로가 최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가려는 삶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 상담의 경우는 그걸 강요할 수 없었다. 남다른 고민으로 혼자 충분히 고통받고 있는E 에게 스스로의 삶을 다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나 친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본인의 행복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도 말하지 않았는가. “미칠 정도로 혼란스러울 때는 자신을 기만하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이다.
E는 현재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하고 맘 편하게 해외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단 말렸다. 그렇게 해외로 나간다 해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처럼 편견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단지 동성애자여서만은 아니었다. 여기에 한국인이라는 소수 민족 사람이라는 것과 재력이나 특별한 기술력이 없는 상황이라는 게 더해져 오히려 더 갈 곳 없는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이 점을 함께 언급하며 경각심을 일깨워줬다.
그리고 E에게 일단 5~6년간은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라고 조언했다. 그때까지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좀 더 인내하며 전문가로서의 역량과 경력 구축에만 온전히 힘쓰길 권했다. 사실 이건 성체성이라는 장벽을 가진 E에게만 해당되는 조언은 아니다. 학벌이나 경제력 등 또 다른 진로장벽에 가로막힌 사람들도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고 나아가야 한다.
사실 E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부모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더욱 무겁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걱정만 하며 시간을 소모하는 것도 옳지 않다. 분명 상황이 특수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커리어 구축을 소홀히 한다는 건 변명밖에 안 된다. 그랬다가는 문제가 더더욱 심각해질 게 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에 오를 때까지는 그저 묵묵히 자기 성장에 초점을 맞춰보라고 말해줬다. 그때가 돼서 부모님께 진실을 밝혀도 결코 늦지 않으니 말이다. 더불어 성정체성과 상관없이 이성과도 만나보길 권했다.
성정체성은 분명 진로장벽이다. 당장의 취업 문제뿐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인생의 관점으로 볼 때도 분명 큰 장애물이다. 하지만 E만 이런 장벽에 가로막힌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장벽에 맞닥뜨려 있다.
진로장벽에는 실로 여러 가지가 있다. 내적으로는 자신감 결여, 낮은 자존감, 열등감, 부정적 마인드 등이 있고 외적으로는 나이, 외모, 키, 몸무게, 학벌, 스펙, 언어 능력, 부모의 반대, 경제적 형편 등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내가 가르친 적 있는 조영찬 군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말하지도 못하는 신체장애를 안고서도 서른여덟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마침내 대학에 입학했다. 장애를 극복하고 꿈을 이룬 것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조영찬’이라는 이름을 검색해보라. 이제는 대학을 졸업해 작가 겸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잠시 가르쳤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뿌듯해서 마구 자랑하고 다닌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문제만 특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E군이 고민하고 있는 성정체성과 같은 문제는 자신과 무관하다며 외면해버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두 각자의 문제에 봉착해 있고, 그 내용은 다르지만 해답은 일맥상통한다. 삶에서 마주치는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은연 중에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앞에 놓인 거대한 장벽을 극복하고 꿈을 이룬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앞에 놓인 장벽을 두려워하며 도망가려고만 하지 말고, 과감하게 그 장벽을 깨뜨려보자. 다른 어떤 사람보다 삶의 자세와 태도를 굳건하게 바로잡고,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묵묵히 굳혀나가는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핑계로
전진해나가는 것을 멈추지 마라.
그 장벽을 깨뜨리는 순간,
이전의 괴로움을 충분히 보상받을 만큼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릴 것이다.
도서 <따뜻한 독설>중에서
출처: 도서 <따뜻한 독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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