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나는 지독하게 나 자신이 싫었다. 가정도 싫었고, 사회도 싫었다. 어찌 보면 그래서 학생운동에 눈뜨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일과 더불어 학생운동을 병행했다. 공부는 딴전이었다. 잘못된 사회체제와 군부 정권에 반발심만 컸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분노했다. 짧은 시간만으로도 학생운동에 깊이 빠져들었다. 대학 2학년이 되어서는 총학생회의 간부 직책을 맡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학생운동은 사상 공부로 시작되었다. 모임과 토론을 많이 가졌다. 여러 대학모임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거리로 나갔다. 내가 살던 부산뿐 아니라 타 도시까지 지원시위를 나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서면으로, 부산역으로, 서울역으로, 광화문 광장으로 거의 날마다 최루탄과 지랄탄에 쫓겨 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분신자살을 생각해봤다. 나처럼 단순한 사람들은 그렇게 폭발하기가 쉬웠다. ‘국가를 위해서, 사회 변혁을 위해서 내 한 목숨 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정말 치기 어린 열정이었다.
돌이켜보면 마음 한구석에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또한 숨겨져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잘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부하는 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인맥, 기술,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의지도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러웠다. 너무도 암울한 미래의 어두운 그림자만 그려졌다. 내 젊은 날의 청춘은 정말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모자란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만일 불안한 미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부모님께 불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의명분을 찾기 위해 ‘분실자살’이라는 것을 떠올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는 내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그렇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물불 가리지 않고 ‘국가를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라는 순수한 열정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2년 동안 도서관에 1시간도 앉아본 적이 없었다. 물론 수업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학생운동에 빠져 있던 나에게 실망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 측 지원으로 떠난 1박 2일 워크숍에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걸어두었던 최면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게 되었다. 술에 취한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교수님에게 막말을 하면서 술을 더 먹게 돈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는 추태가 나의 두 눈을 뜨게 했다.
그것은 분명 일부 학생의 문제이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학생운동의 과격한 문제 처리 방식에 회의감이 들었다. 어쩌면 학생운동 역시 몹쓸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와 일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자 학생운동 자체에 환멸감마저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나의 대학생활 모두를 바쳤건만 돌아온 결과는 빈껍데기뿐이라는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다. 내 삶 자체도 엉망이었다. 1년이 흘렀지만 집안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다음 학기 등록금조차 못 낼 형편이었다. 아버지가 군대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말도 잘 안 듣던 내가 그날은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다음 날 입대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2달 뒤 입대했다.
생각 외로 군대는 편했다. 육체적으로 편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편했다. 더 이상 가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아서 좋았다. 더 이상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서 좋았다. 무엇보다 큰 고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도 괜찮다는 것이 좋았다.
덕분에 깨끗한 백지 상태가 되었다. 1년가량을 그렇게 보냈다. 멍청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과거를 깨끗이 비울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체력도 키우고 정신도 차리고 군 생활 틈틈이 책을 보며 미래를 준비해 나갈 수 있었다.
안정적인 직업군인으로서 군 생활을 계속할까도 고민해봤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싶어 5년가량의 군 생활을 접고 복학했다. 착실하게 월급을 저축한 덕분에 부모님께 재정적으로 보탬을 드릴 수 있어 그 동안의 불효를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기분이었다. 모 장학재단을 통해 무이자로 등록금 대출을 받게 되어 등록금 걱정도 없어졌다. 그동안 우리 네 가족 모두 열심히 일하며 고생한 덕분에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다.
제대 후 사회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특히 대학교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최루 가스 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막걸리 냄새도 없어졌다. 학생운동보다 학구열에 불타는 분위기였다. 입대 전에는 공부하는 학생들을 시대의식이 없는 지식인으로 취급하곤 했는데, 이젠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을 바보 취급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당시 공기업이나 대기업에서는 입사 시험을 치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단골 문제로 나오던 것 중 하나가 ‘버블제너레이션’이라는 단어였다. 나처럼 학교 다닐 때 공부 안 하고 시위만 하다가 사회 나와서 적응하지 못하는 86, 87, 88학번 세대를 일컬어 ‘거품 세대’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나고 보니 다소 작위적으로 만든 신조어였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그렇게 386의 마지막 세대로서 사회적 놀림감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땐 세상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었다.
불타는 젊음이 있었다. 아름다운 청춘이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회의식도 있었다.
다만 너무 어렸을 뿐…. 어린 만큼 어리석고,
미성숙한 면도 많았다. 그렇다고 도서관 책상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혼미한 시대였다.
책 대신 치기 어린 열정이 우리 미래를 지탱해줬다.
때론 미친 열정이 필요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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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저서: <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 <가슴 뛰는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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