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커3 피터 드러커 생애 - 유럽에 대한 실망 함브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시절: 기업과 사회에 대한 관찰 드러커는 1927년 빈 김나지엄을 졸업하고, 그 해에 독일 함부르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며, 재학중 소규모 무역회사에서 3개월간 견습생으로 근무했다. 1927년이 다 저물어 갈 무렵, 견습서기로 취직한 지 4개월 만에 드러커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어 빈에 돌아왔다. 그런 드러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간지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Austria Economist)의 신년 특집호의 편집회의에 나오라는 초대장이었다. 드러커는 열 네댓살 무렵부터 그 잡지를 애독하고 있었으나 편집자와는 만난 일은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에서도 이름있는 잡지였다. 창간 당초는 [런던 이코노미스트](London Economist)를 모델로 하.. 2007. 12. 13. 피터 드러커 생애 - 지적 분위기속에서... 살롱과 도서관 드러커가 어린 시절부터 유럽 상류사회의 사교 및 지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게 된데는 전술한 헴의 처 게니아 여사가 운영하는 살롱에 초대되면서 부터였다. 그녀의 살롱에 출입하는 사람 가운데는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도 있었다. 드러커는 "내가 그녀의 살롱에서 만을 만난 것은 16세 때였다. 만은 노벨상을 받기 수년 전이었는데, 그는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게니아의 살롱에서는 누가 언제 [주역]이 될지 몰랐다. 내가 출연자석에 최초로 앉은 것은 14, 5세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세계무역에서 파나마운하의 영향]을 조사하고 있었다. 개통한 지 10년 안팎이라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고 회고.. 2007. 12. 13. 피터 드러커 생애 - 격동의 20세기 초 2005년에 작고한 피터 드러커 교수는 내 인생의 멘토이기도 하다. 드러커 교수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정과 교훈은 '나의 인생, 나의 꿈'에 별도로 올리도록 하겠다. 국내에서 드러커 교수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대구대학교 총장출신의 이재규 박사님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드러커 교수에 대한 정보를 옮겨본다. 죽는날까지 완벽을 추구하신 그 분, 또한 그 분을 뛰어넘고자하는 분들에게도 큰 교훈이 되리라. 1. 격동의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부모의 영향 피터 페르디난드 드러커(Peter F. Drucker)는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부친 아돌프는 오스트리아의 재무성 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모친.. 2007. 12. 1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