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은 내게 특별한 달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20여 년 전 군대를 입대한 달이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못돼 대학을 더 다닐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1987년 6.10항쟁을 통해 그토록 투쟁하고자했던 군부도 타도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면을 쓴 전두환 정권의 앞잡이 노태우의 6.29선언에 온 국민이 속아 넘어간 달이 유월이기도 하다.
당시 군부타도의 기회가 있었건만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 단일화를 끝내 이루지 못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10년 후퇴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한탄스럽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지독하게 매달렸던 학생운동에도 회의가 느껴졌다. 게다가 축제기간에 발생한 패싸움으로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에 간접적으로 기인한 탓에 개인적 죄책감도 있었다.
(이미지출처: 네이버 6월항쟁 사진 중 '민주정부 수립요구 집회', 원출처미상)
여러모로 어지러웠다. 그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가장 싫었다. 가난한 처지에 아무런 미래도 없으면서 방탕하게 시간을 낭비하고만 있는 무능한 내 자신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죽을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럴 대의명분도, 죽을 용기도 없었다. 이 혐오스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버지가 입대를 권유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최선의 도피처로서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록금도 없는 형편이니 돈도 벌 겸 직업군인으로 자원입대했다.
1988년 6월 1일이었다. 입대하던 날, 어머니는 집 밖으로 배웅조차 나오지 못하셨다. 집안을 나서는 내 모습을 보고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울음을 애써 참고 계셨다. 아마도 내가 아파할까봐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참고 계셨던 것이리라.
역으로 향했다. 역전에는 나를 위해 배웅 나온 친구와 선후배들이 20여 명은 족히 되었다. 사실 어느 때보다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에 한 순간이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울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과분한 사랑이었다. 혼란스러웠던 모든 일들을 잊고 입영열차에 올랐다.
남들은 군대가 힘들다고도 토로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훈련소에서의 군대생활이 더 마음이 편했다. 힘들었던 세상을 등지고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깨끗하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사실 생각을 하기도 싫었다.
(이미지 출처: 뉴스한국 5월30일자 기사 '봉쇄된 서울광장', 87년 6월항쟁 때의 사진이 아니라 2009년 5월 30일자 오늘의 모습이라는 사실에 더욱 큰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지러운 일들이 있을 때 때때로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느꼈다. 깨끗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지운 상태에서 다시 시작했다. 졸업 후에도 여전히 나는 문제 투성이었다. 하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내가 원하는 것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오늘,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변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올라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故노무현 전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아무 일 없는 듯 돌아가는 일상이나 TV를 보면서 일종의 회의감마저 느껴졌다. 정말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컴퓨터가 문제가 생겨 전원을 껐다 켜면 그냥 복원될 때처럼...
그렇지만 너무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너무 쉽게 잊혀져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나 역시 반성의 마음이 든다. 그런데 다분히 의도적으로 우리의 슬픔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일부 무리들의 의도적 행동에 그 설움이 더 했다.
사실 20여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권위주의적 권력이 복고되지 않은가 우려의 감정을 털어내기 힘들었다. 볼썽사납게 경찰버스로 바리케이트를 쳐서 강제로 폐쇄되었던 서울광장이 개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적 모임이나 발언은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다.
지식인들이 끝임없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건만 소귀에 경읽기가 아닐까 걱정스럽다.
부디 일부 퇴보와 퇴행은 있을지라도 민주주의 발전에 후퇴는 없는 우리 사회의 오늘과 내일을 소망한다.
20년 전에 군부타도를 외쳤던 한 청년이 유월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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