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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번 직업을 바꾼 남자

가족내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by 따뜻한카리스마 2008. 12. 31.


불쌍한 한국의 아버지
어머니와 달리 소외받는 존재 "아버지"
집안에선 귄위 세우지만, 사회에선 찬밥
신경 쇠약으로 정신병원까지 입원한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에게 <그림자>와 같은 존재


한국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한국사회에서 어머님의 무한하고 자상하신 사랑이야 너무나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뒷전에 놓인 듯한 우리 한국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부끄러워 아버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나눠도 꺼리낄 것 없어서 한자 적어 본다.

혹자는 한국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뼈 빠지도록 일하지만 사실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집안에서는 외부에서 받는 차가운 사정을 차마 말 못한다. 오히려 큰소리 치며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권위를 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년에 이르러서는 아내나 아이들로부터도 사랑 받지 못하고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 겉도는 경우가 많다. 노년에는 자식들로부터도 제대로 인정을 못 받게 되는 것이 우리네 한국의 아버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으로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을수록 더욱 더 초라해지는 경우가 많다.

어린시절, 아버지에 대한 추억 "저렇게 안 되었으면 하는 롤 모델"
사람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을까? 나에게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옛적의 아버지 모습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유년시절에 무척 엄한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좀 더 솔직히 말해 내 기억에는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대략 6~7세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아버지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는 주사가 심하신 분이었다. 술만 드시면 어머니를 닥달하시곤 했다. 평소에는 인정스럽고 순하신 분이셨다. 하지만 술만 드시면 밤에는 난폭자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너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는 크면 '결코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거야'라는 다짐을 하곤 했다.

(임진각에서 북녘땅을 바라보고 계신 아버지, 지나온 인생이 한없이 후회스럽기도 하다고 하신다. 과거에 대한 후회로 극도로 신경이 쇠약해져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 당신도 한 남자였음을 왜 미쳐 몰랐던가. 아버지는 미워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이해받고 사랑 받아야 될 존재이다.)

귀하게만 컸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
아버님의 본관은 '하동'이고 고향은 '경남 함양'이었다. 외동이셨는데, 아버님의 생부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큰아버님의 종손으로 입적되셨다. 또한 아버님의 생모도 일찍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나는 한번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제대로 보지도 그리고 듣지도 못했다. 단지 큰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와 젓가슴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생부와 생모를 일찍 떠나보내셨다. 하지만 종손으로서 부유하게 성장하셨다. 유모도 있었고, 아버님을 돌봐주는 하인들까지 별도로 있을 정도였다. 모든 면에서 풍족하셨다. 그래서 굉장히 귀하게 크셨다. 일부 친지들은 너무 귀하게 커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성장했다고 말하신다. 덕분에 사회물정을 잘 모르셨던 모양이다. 

반면 아버님의 하인으로 일하셨던 분중에 한 분은 중견 그룹의 사장이 될 정도로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분이 아버지 어려울 때 도와주신다고 찾아오신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아버님 인생의 첫 실수 - 대학 포기

아버님은 남성다우시면서도 순진하고 여린 구석이 있었다. 온순하면서도 울컥하시는 성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분이셨다. 아버지 세대분으로서 당시에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부유하던지 아니면 부모가 지식에 대한 욕구가 아주 강하든지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했다. 사실 돈 없으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그 당시 대학이었다.

돈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대학을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들어갈 대학을 들어가지 못했다. 읍내로 가다가 만난 친구에게 돈을 사기 당한 것이다. 그 친구가 대학에 등록금을 내러간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버지의 등록금을 훔쳐가 버린 것이었다. 만일 아버님이 그 당시에 대학만 들어가셨더라도 모든 상황이 상당히 바뀌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식인으로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버님은 그 친구를 꽤씸히 여겼다. 하지만 크게 게의치 않으셨다. '대학교는 운명이 아닌가보다' 생각하시고 대학을 포기하셨다. 그것은 문제였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시다가 군대를 가셨다. 일반 병사로 들어가셨다가 직업 군인으로 전환하셨다. 13년간 군대 생활을 지속하셨다. 하사관으로 직업군인 생활을 시작하셨다. 장교로 전환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님은 거절하셨다. 그것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잔고가 빈 통장만으로 어머님과의 결혼 성공
여하튼 그렇게 아버님은 군생활을 시작하셨고, 군 생활 중에 지금의 어머님을 만나셨다. 어머님과의 결혼도 일종의 사기(?)였다. 어머니에게 직접 구혼을 몇번 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자 당시 부산일보 기자를 하시던 큰외삼촌을 붙들고 사정사정 매달려 결혼에 성공했다.

어머님은 오빠의 권유로 다시 아버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키182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인물, 그리고 순수한 행동 등이 여자를 사로잡기에는 매력이 있으신 분이었다. 어머니 역시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통장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신뢰감을 느꼈다. 통장을 가졌다면 적어도 성실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어른들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에 통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통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알뜰하게 저축을 하는 사람으로 평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였다.) 

당시에는 아내가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아버님의 눈썹사이에 있는 상처도 3년 후에나 잠자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알았다고 한다. 그 정도니 남편에게 대든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시대였다고 한다.

여하튼 어머니는 결혼후 재정관리를 위해서 아버님께 저축 통장을 보자고 하셨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당시이 나를 싫다고 해서, 당신 따라다니느라 속상해서 술로 모든 돈을 다 탕진했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때는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 전에 이렇게 상대를 속이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내 친구 중에 하나도 지금의 아내가 당시에 자신을 떠날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친구: '내가 말 안할려고 했는데, 사실 땅이 있는데,,,'
친구애인: ...(속생각, 으아, 이 어려운 시대에 땅이 있다니. 대단한 사람인 걸)

결혼후 친구 와이프가 '땅이 어디 있어요?'라고 묻자 '땅은 무슨 땅, 세상이 다 내땅이지~'라는 엉뚱한 말을 듣고 황당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들은 그렇게들 어머니를 속이고 결혼을 하신 것일까? 나도 그랬었나? 기억 없음 ㅎㅎ*^^*

인생 최대의 아픔, 두번째 실수 - 지나친 강직성과 불명예 제대
아버지는 그렇게 결혼후 첫아이였던 형님을 낳고 돌이 지나자마자 월남으로 참전하셨다고 한다. 당시 월남용사들은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보급 부대 창고장이었으므로 아버지의 끗발도 아주 센 편이었다. 휴가차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보급 부대를 들려서 군수품을 부탁했다. 아버님은 그런 분들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봐서 거저 주었다. 하지만 보안부대니 헌병이니 장교니 하면서 힘을 쓰는 사람들이 요구할 때는 오히려 더 철저하게 군수품을 나눠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었던 사람들은 아버지를 표적으로 삼았다. 한 보안대 상사의 밀고로 군수품을 빼돌리던 부하의 죄를 아버님이 책임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불명예 제대까지 당하시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닥친 젊은 날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아니,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오욕에 남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셨다. 자신에게 오명을 남긴 상사를 죽일 것이라고 날마다 칼을 갈았다. 칼을 들고 월남전 용사들이 돌아오는 인천 앞바다에 날마다 죽치고 앉아서 기다렸다.

인생의 세번째 실수 -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던 인생
그렇게 술어 절어사셨다. 알콜 중독 수준이었다. 당시의 치욕에 분노하며 수년간을 폐인처럼 사셨다. 그 이후로도 10여년간 제대로 된 직장도 다니지 않으셨다. 이후 하시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하셨다. 조그만 직장이라도 들어가시면 좋았으련만 남의 밑에서 생활하기 싫어하셨다. 덕분에 정상적인 직장을 한 번도 다니지 않으셨다.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하셨다. 하지만 흔들리는 나약한 의지로 실행 부분에서 실수를 자주 범하셨다. 한번은 10여명의 이발사를 두고 큰 이발관도 운영해보신 적이 있었는데 재정관리를 안하셨다. 직원들만 믿고 밖으로만 다니시다 결국 망하셨다. 그 정도로 사회 물정을 제대로 모르셨다. 어머니가 한푼두푼 모으셨던 돈도 밑빠진 독에 물붙기 식으로 그렇게 빠져나갔던 것이다.

결국 빈번한 사업실패로 한 푼의 돈도 없이 빈털털이가 되어서 어머님의 외가쪽 밭을 빌려 일하는 농부가 되셨다. 사실상 소작농이 되신 것이었다. 소작농을 부리시던 거부가 초라한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역시 몇 번의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아버님은 번번이 실패하셨다. 어머님의 고생은 더욱 심하셨다. 그렇지만 아버님의 폭정은 50대가 되어서도 계속되었고 환갑이 다되어서야 겨우 수그러져지셨다.

자식에게 조차 사랑 받지 못했던 아버지
평소에는 멀쩡하셨다. 하지만 늘 술독에 빠진 듯이 사셨다. 밤에 돌아오시면 주사를 한번씩 심하게 하셨다. 아버님의 투정을 어머님은 다 들어주셨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잠자고 있는 우리들을 깨우거나 하는 것을 늘 염려하셨다.

하지만 아버님은 취기로 잠들어 있는 형과 나를 늦은 밤에도 깨우곤 하셨다. '내가 너희들 애비다~' 한마디 툭 던지고 말대꾸를 하면 화를 내시기도 하였다. 형님은 성격이 여성적이어서 감히 아버님에게 대항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특히 어머님을 못살게 굴 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비록 힘은 없지만 두 손으로 막고 대항을 했다. 내가 어리기에 더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손찌검을 당한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 어머님에게도 손찌검을 하는 경우는 없으셨다.

그렇지만 나는 술주사가 심한 사람을 가장 싫어하게 되었다. 또한 비록 내가 유순해 보이지만 옳지 못한 일이라면 상사를 막론하고 굉장히 강력하게 대항하는 주장을 펼치곤 하는 기질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가끔씩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기도 하였다. 아마 어릴 때 생긴 기개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형님은 성장할수록 아버님을 노골적으로 싫어하셨다. 아버님을 회피하셨다. 아버님은 그렇게 자식으로부터 한번도 제대로 이해받거나 사랑받지 못하시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자식들과도 서먹서먹해지면서 아버님의 기세도 세월이 감에 따라 조금씩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신경이 쇠약해져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환갑이 지나시고 아버님은 극도로 신경이 쇠약해지셨다. 육체적으로 기운도 한풀 꺽이셨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도로 약해지시는 것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 악몽에 지독하게 시달렸다. 심지어 헛것에 시달리시기도 하시는 경우가 많아졌다. 눈을 뜬 대낮에도 과거가 후회스러워 술을 마셔야만 되었다. 진정이 될 수 없었다.

급기야 1999년 11월 정신병원으로 입원까지 하게 되셨다.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아버님의 동의하에 입원을 하시게 된 것이다.

어머님의 수술로 인한 2달간의 입원 이후에 아버님의 연이은 입원은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일반적인 건강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더 충격적이었다. 정신병원이라 면회시간도 제한이 많았다. 어느 날 병문안을 갔다가 나약해지신 아버님의 몰골과 말투에 눈물이 울컥했다. 차마 아버지 앞에서 울지 못하고 화장실에 뛰어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목놓아 울고 말았다. 울음이 그치지 않아서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이대로 불효하다가 두 분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내겠다 싶었다. 그해 12월 지금의 와이프에게 청혼을 하였다. 와이프는 한참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선택이 내가 잘한 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여하튼 정말이지 내 결혼식 후 아버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금씩 건강해지셨다. 칠순이 지나서도 일을 나가실 정도로 건강하신 편이다.

가족이 모두 함께한 아버님과의 한풀이
아버님의 칠순 때였다. 회갑도 제대로 못한터이라 잔치라도 호텔에서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셨다. 그래서 어른들끼리 제주도라도 보내드릴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거절하셨다. 조촐한 가족여행을 원하셨다. 그래서 경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그날 오후에는 경주 시내를 관광하고 저녁에는 유명한 암소갈비집에서 식사도 같이 하였다. 그렇게 밤에 콘도를 들어와서 생신 축하 파티를 하였다. 케익 절단후에는 가족별로 선물 증정이 있었다. 그리고 와이프와 내가 아버님께 편지를 드렸다. 사실 난 그 때 캠코더로 촬영중이어서 아버님의 눈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중에 와이프가 '아버님, 행복해서 우시는 것 같더라!'라고 말해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최고의 칭찬 "이젠 더 오래 살아야되겠다!"

"내가 전에는 빨리 죽어야지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너희들 결혼하고 잘 살아가고 있고 또 아이들 커가는 것 보니, 이젠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젠 더 오래 살아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젠 더 오래 살아야겠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귓전에서 계속해서 울렸다. 나에게 지금까지 해주신 너무 너무 큰 최고의 칭찬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한켠에 묵직하게 남아있던 아버님과의 한을 푼 자리가 아니였나 생각되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 뜻깊은 가족여행이었다.

우리의 아버님은 이렇게 작은 정성에도 감동하시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며, 달력에 내가 나오는 휴가일에 빨간줄 긋던 아버지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휴가 나올 때마다 달력에 빨간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 궁금했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님에게 이 표시가 무슨 표시냐고 물어보았다. '응, 그건 아버지가 네가 휴가 나올 날짜를 미리 표시해 놓은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말 한 마디 안하셔도 그렇게 자식을 말없이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도 결국 이해받아야할 하나의 존재다!
대한의 아버지들은 대개 그렇지 않을까. 내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말로 다하지 못하는 큰 사랑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다소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대한의 아버지들은 나름대로 성실히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사회적 여건이 뒷바침되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회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제대로 이해받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에 대한 한을 가지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에 대한 한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성인이 되어서도 가슴속에 묻혀있는 한을 풀지 못하는 있는 경우가 있다. 가족간에 묵힌 한을 풀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은 특히 한이 많은 민족이다. 신분으로, 가난으로, 학력으로, 배고픔으로, 집없는 설움으로, 영적으로, 못배움으로, 천한 직업으로, 가족으로, 지방이라서,,,등등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없었던 삶으로 응어리진 일이 많다. 그래서 한이 많은 민족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자신의 아픈 기억들을 하나씩 드러내서 적어봄으로써 무의식속에 남아 있던 한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한풀이가 때로 필요하다.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처럼...

아버지 인생을 돌이켜보면 누구보다 열심히 살려고 애썼으나 사회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소외받아 오지 않았나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내 아버지로부터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어머니가 태생적으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아버지는 태생적으로 소외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아버지가 된 지금에서야 새삼스럽게 느낀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족에게 있어서 그렇게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보이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나도 그렇게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고 싶어하셨던 인정 많으신 아버님이 오늘 문득 더 그립다.

불효자식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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