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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직업

온갖 역경을 딛고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김태연 회장의 성공전략

by 따뜻한카리스마 2016. 3. 28.

150cm의 작은 키와 소수민족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신화를 창조한 김태연 회장. 그녀는 1946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한 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루 자정 무렵이었기에 온 집안사람들은 ‘세상을 흔들 장군감’이라며 아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가 사내가 아니라 계집아이라는 사실에 가문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할아버지는 “제가 조상님들께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고 외치며 탄식했다. 할머니는 “우리 김씨 집안 망했네.” 하면서 부엌에서 끓이던 미역국을 솥 마당에 내던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집안을 망하게 할 아이’로 낙인이 찍힌 채 모진 시련이 시작됐다.

 

특히 아버지의 지독한 냉대는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할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인한 피해는 결국 그녀의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기울어가는 집안 살림을 꾸리느라 어머니의 손톱에 피고름이 맺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그녀를 붙잡고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차라리 같이 양잿물을 마시고 죽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넌 안 돼, 넌 재수 없는 년이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왜, 난 안 돼?’라는 반문이 일었어요.”

 

어린 김태연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외삼촌들의 무도 수련을 보았다. 자신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술을 가르쳐달라고 졸라댔다.

 

외삼촌들은 “계집애가 운동은 무슨 운동이냐. 속 썩이지 마라. 운동은 안 돼. 너는 절대 할 수 없어. 설령 한다 해도 지쳐서 못 할 거다. 집에서 살림하고 있다가 남편감 찾으면 시집이나 갈 생각해라.”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무술을 배우게 되었고, 어려운 수련과정을 모두 견뎌내 외삼촌들을 놀라게 했다.

 

김태연은 스무 살이 다 될 때까지도 계속 아버지로부터 냉대와 구박을 받았다. 종종 퍼렇게 멍이 들도록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다. 술 취한 아버지가 그녀를 때리는 것을 본 남동생이 흥분해서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한 것이다. 결국 남동생은 아버지를 때렸다는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그녀와 가족들은 1968년 도망치듯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 와서 2년 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강요 속에 얼떨결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중 그녀의 할아버지가 알게 된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두 명의 시누이는 한국에서 온 작은 동양인을 구박했다.

 

힘든 시집살이로 인해 그녀는 두 번이나 유산을 했고, 식물인간 상태가 되기도 하고, 교통사고와 자궁종양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했다. 시댁과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분가도 해보았지만 이미 부부 사이의 애정은 사라진 후였다. 결국 결혼 10년 만에 이혼했다.

 

■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그녀는 이러한 모든 불운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그도 하고 그녀도 하는데, 왜 나라고 못 하겠어?)”를 외치며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녀는 인근 고등학교를 찾아가서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달간 매달렸다. 그 덕분에 겨우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열정적으로 학생을 지도하는 그녀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학교와 사회단체로부터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녀 역시 부지런히 수련했다. 결국 미국 최초의 여성 태권도 공인 8단의 ‘그랜드마스터’에 올랐다.

 

김태연은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엄한 가르침과 애정을 함께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를 어머니처럼 따르던 몇몇 제자들이 양자와 양녀가 됐다. 그렇게 해서 6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가지게 됐다.

 

1982년 그녀는 두 양아들과 함께 컴퓨터 사업에 도전하지만, 투자한 돈을 모두 잃는 실패를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85년 자식들을 이끌고 실리콘 밸리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산호세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벤처사업을 시작한다.

 

끼니마다 수제비와 고구마로 배를 채우며 힘들게 꾸려간 벤처사업은 연매출액 1천 5백억 원이 넘는 컴퓨터 클린룸 시스템 제조회사인 ‘라이트하우스 월드와이드 솔루션사’로 성장했고, 미국 500대 우량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사업 분야를 넓히면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모닝플라넷, 미용성형장비와 스킨케어를 전문으로 하는 엔젤힐링, 데이타스토어X 등의 회사를 설립하고, 케이블TV 공급업체인 노스스타를 운영하면서 본인이 직접 TV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수많은 수식어가 김태연 회장 앞에 붙지만 무엇보다 ‘Can do(할 수 있다)’라는 말을 뺄 수가 없다.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딛고 일어선 김 회장은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다짐을 수없이 하면서 험난한 삶의 파도를 넘어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김태연 회장의 비전은 하나의 신념이 되어 그녀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벽을 허물어버렸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벽을 Can do 정신으로 허물어버리자!

 

김태연 회장의 성공비밀

1. 핸디캡을 극복한 강력한 신념

2.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

3. 강인한 마인드와 결합된 강인한 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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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코치 정철상은...

인재개발연구소 대표로 대구대, 나사렛대 취업전담교수를 거쳐 대학, 기업, 기관 등 연간 200여 회 강연을 하고 있다. 나만 몰랐던 취업비법》, 대한민국 진로백서, 서른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아보카도 심리학 등의 다수 도서를 집필했다. 대한민국의 진로방향을 제시하며 언론과 네티즌으로부터 젊은이들의 무릎팍도사라는 닉네임을 얻었으며 정교수의 인생수업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대한민국의 진로성숙도를 높이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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