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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과 도서관

드러커가 어린 시절부터 유럽 상류사회의 사교 및 지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게 된데는 전술한 헴의 처 게니아 여사가 운영하는 살롱에 초대되면서 부터였다.

그녀의 살롱에 출입하는 사람 가운데는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도 있었다. 드러커는 "내가 그녀의 살롱에서 만을 만난 것은 16세 때였다.

만은 노벨상을 받기 수년 전이었는데, 그는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게니아의 살롱에서는 누가 언제 [주역]이 될지 몰랐다.
내가 출연자석에 최초로 앉은 것은 14, 5세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세계무역에서 파나마운하의 영향]을 조사하고 있었다. 개통한 지 10년 안팎이라 아직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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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커는 말년의 (《미래의 결단》 《21세기 지식경영》 등) 여러 저서에서 "기업 또는 개인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보다는 강점을 더욱 보강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아마도 살롱 출입 때 들은 유태인 랍비의 다음과 같은 충고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神)은, 생각할 수 있는 한의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인간을 창조했다. 따라서 타인의 잘못에서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훌륭한 행동에서 배우라."

당시 유럽의 도서관은, 미국의 공공도서관과는 달리, 책을 쌓아만 두고 사람들의 접근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빈대학 부속도서관은 학생에 대해서 특별 열람실의 출입만 허용했고, 거기서 그들에게 열람이 허용된 책도 숙제로 부과된 교과서류에 한정되어 있었다.
책의 대출이 허용된 것은 공인된 정식 학자에 한해서 였다. 그러나 그들일지라도 책장에 접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빈대학의 교수진 속에는 드러커의 삼촌과 사촌이 몇 명 있었다. 뿐만 아니라 드러커의 부친도 오랫동안 동대학의 시간강사로서 수시로 강좌를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커는 빈대학 도서관의 이용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학 도서관은 이용할 수 없더라도 국립도서관이 있었고, 국립도서관에는 부친의 친구 트라운 트라우네크 백작이 있었다. 백작은 드러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손님으로 도서관에 출입하게 하고는, 자신의 집무실 옆의 작은 방을 사용해서 읽고 싶은 책은 뭐든지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쾌히 승낙해 주었다.
드러커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그 길로 국립도서관으로 가서 법철학이나 사회학 책을 안심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트에 대한 추억
드러커의 부모 모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오랜 친지간이었다. 또 드러커의 모친은 부친과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프로이트의 저서를 사 모으고 있었다 (지금도 드러커는 모친이 애장하고 있던 1900년 발행 《꿈의 해석》 초판본, 애석하게도 3백 51부밖에 팔리지 않았던 그 초판본 중의 한 권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빈의 의학계가 유태인인 프로이트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빈의 의학계) 자체가 바로 지극히 유태인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에 대한 빈 의학계의 비판은, 정신분석의 신봉자까지도 표명한 비판은, 첫째, 그가 유태인 치료자로서의 기본적 윤리를 짓밟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선구제환자(무료환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는 "정신분석과 의사는 무료로 환자를 치료해서는 안된다, 아니 환자에게 충분히 치료비를 내게 하지 않는 한 치료효과를 거둘 수 없다"고까지 가르친 것이다. 이는 빈의 대다수 의사가 믿고 있던 유태 전통에 비추어서 말하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비도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의사는 환자에게 일체 동정심을 표시해서는 안된다. 환자 개인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가져서도 안된다. 가령 의사가 환자를 인간적으로 취급하면 환자의 용태를 악화시키고 환자의 의뢰심을 조장하여 회복을 방해할 뿐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자는 의사의 동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의사를 치료자로부터 기계공으로 격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빈의 유태인 의사 전원에게 있어, 아니 유태인 의사에 한하지 않고 어느 의사에게 있어서나 이것은 그들이 의사가 된 이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생활인으로서, 그리고 직업인으로서 그들의 신조를 분명히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드러커는 산업사회의 우수한 지도자들, 예를 들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등은 "환자나 노동자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지시하거나 가르치기만 했다"고 지적하면서 [성과]에 대한 정의 그리고 쌍방향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프로이트에 대한 추억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3∼1883)는 그의 연구의 대상이었던 땀 흘리는 노동자를 직접 만나 보기위해 공장에 간 적이 없다. 당시 상류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는데, 드러커의 할아버지는 주머니가 거의 없는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대학 진학을 강조한 부친
대체적으로 당시의 유럽에서는, 특히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바젤 같은 상업도시에서는, 그러나 그 정도가 그다지 심하진 않았지만 빈에서도 양가집의 가장 뛰어난 자식은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는다는 전통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진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14세쯤에 일하러 나갔다.
예를 들면 회계사무소나 가게에서 견습생으로 근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러커의 부친은 드러커가 대학에 진학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드러커의 집안은 관리와 변호사와 의사의 가계였다. 또한 부친은 드러커가 상인으로서의 기지와 재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부친은 정확했다.

드러커는 "요컨대 내게는 대학의 교수가 되라는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실, 드러커의 주위에는 대학교수가 많이 있었다. 아저씨나 사촌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친척들이 빈이나 프라하의 대학 그리고 스위스나 독일의 대학,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법률·경제·의학·화학·식물학·미술사·음악을 강의하고 있었다.

따라서 드러커에게, 교수생활은 충분한 여름휴가가 있고 임무로서 부과되는 일이 적어 편한 생활로 보였다. 게다가 특히 사회적 지위에 관한 한 다른 어떤 직업도 [교수]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그 사회적 지위는 융커(Junker, 지방귀족)라는 경쟁상대가 있는 독일에서보다도 한 단계 더 높았다.

출처; 대구대 경영학과 이재규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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