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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번 직업을 바꾼 남자

당신은 좋은 아버지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by 따뜻한카리스마 2014. 12. 1.

어제는 아버지 팔순!

 

칠순 때는 가족 여행도 떠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여행하는 것은 겁을 내셔서 여행이나 거나한 잔치 대신에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과 모여서 조촐하게 식사자리를 가졌다. 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 자리를 빌려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마음대로 끼적거려본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나에게는 너무도 무서운 존재였다. 아버지 연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180cm가 훌쩍 넘는 큰 키에, 13년간의 직업군인 생활을 하시면서 월남전까지 참전한 용사이고, 전역 후에도 늘 전투화를 신고 다니던 아버지는 무서운 존재 그 자체였다.

 

평소에도 조금은 무뚝뚝한 분이라 농담 같은 것을 함부로 건네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 앞에만 서면 기가 죽어서 말을 더듬거리기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말끝을 흐린다고 혼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동네 건달들도 아버지를 피할 정도였다.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이 담배 피는 것을 견디지 못하셨고, 신발을 구겨 신고 다니거나, 껌을 질근질근 싶거나, 건들건들하며 다니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하시고 혼을 내시곤 했다. 건달 여러 명이 뭉쳐 있어도 전혀 겁내지 않고 혼을 내셨다. 그래서 다들 아버지를 무서워하며 피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술을 한 잔 드시고 집안에 들어오시면 특히 더 무서웠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부유하게 성장해서 젊은 날에 모든 재산을 다 날려버리신 분이라 과거에 대한 후회와 한탄이 누구보다 많은 분이었다. ‘그 때 뭐 뭐 하지만 않았어도, 그 때 누구누구만 만나지 않았어도...’하는 식으로 늘 신세한탄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그런 하소연을 어머니에게 하며 주정을 부리곤 했다. 어머니가 워낙 순종적인 분이라 아버지를 잘 따랐지만 아버지 기분을 맞춰주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잠들어 있는 형이나 나를 깨우기도 했다. 일어나서 아버지 말 친구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지쳐 잠들 때까지 새벽녘까지 눈 뜨고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밤 늦게 들올 때면 아버지의 큰 목소리에 이미 잠을 깨곤 했지만 애써 모르고 잠든 척하기도 많이 했다. 당시에 방 한 칸에 우리 네 식구가 다 살았기에 쩌렁쩌렁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한 번씩은 내가 먼저 일어나 아버지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평소에 아버지에 반대하는 의견을 입에 담지도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소리를 지르거나, 손찌검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말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이런 행동이 나약해보이지만 아주 강한 기질적 근성을 길러주기도 했다. 덕분에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 모시고 있던 상사나 경영자로부터 엄벌을 받기도 했다. 사실 나를 억누르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했고 그래서 사표도 과감하고 쓰고 나오곤 했다.

 

아버지는 목소리만 컸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일침을 놓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겁이 났지만 간혹 그렇게 했다. 그러면 실컷 얻어맞을지 알았는데 아버지는 ‘이놈 봐라’라고 말하기만 하고 때리지는 않았다. 간혹 한 대씩 맞기도 했지만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형은 아버지의 기에 완전히 눌려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래서 늘 아버지에게 핀잔을 듣고 꾸중도 더 많이 듣고 맞기도 했다. 덕분에 형은 지금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사실 나 역시도 아버지가 싫었다. 나이가 들면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젊은 날까지도 아무런 꿈을 가지고 있지 않던 나는 오로지 ‘아버지처럼 안 살겠다’는 것이 내 삶의 모토가 되었다.

 

아버지는 하시는 사업마다 족족 다 망했고, 평생을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직장생활을 해보지도 않았다. 돈을 벌어오는 경우보다 돈을 써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어머니가 아무리 돈을 벌어 와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물론 낭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돈을 제대로 벌지도 쓸지도 모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우리 가족은 먼 외가 친척의 밭을 소작하는 소작농으로서 고철버스 안에서 네 식구가 함께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편하고 남루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불편함을 많이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도 친구들에게는 내 삶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 어린 시절의 나는 자신감 없고 위축된 아이로 지냈다. 집안 환경이 부끄러워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기 거대한 벽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나는 형보다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잘 나눴다. 성장해서는 아버지와 이런 저런 대화도 종종 나누고, 식사도 함께 하고, 목욕탕도 다녔다. 때로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단 둘이 아버지 고향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아버지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고, 나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15살의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렇게 해서 자식이 없는 큰 할아버지 댁으로 입양되었는데 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 할아버지 재산까지 상속받게 되었다. 논과 밭과 산 몇 만평이 아버지 재산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돈에 대한 걱정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다니는 모든 길이 자기 재산이라고 생각하며 거들먹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친할아버지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아버지 말씀만 들어보자면 너무 착하고 순하고 온정적인 분이었다. 아버지한테 일체 잔소리를 하지도 않으셨고, 집안에도 손님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부유한 분이다보니 가까운 분에서부터 뜨내기손님들에 이르기까지 손님들이 계속해서 사랑채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런데 한 번은 다리를 삐끗했는데 행랑채에 들린 한 뜨내기손님이 침을 놓을지 안다고 3개월이나 할아버지에게 침을 놓고 돈까지 챙겼으나 결국은 줄행랑쳤다고 한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앉은뱅이로 2,3년가량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계시다가 결국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렇게 누워서 생활할 때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고 하니 얼마나 온순한 기질을 가지신 분인가 싶어서 내 마음이 흐뭇했다. 나에게도 그런 선함의 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짜증이 많고, 울컥 화를 내기도 해서 기질적으로 천성이 그런 사람일까 늘 이런 의문을 품고 있기도 했는데,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전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는 말에 무척 힘이 났던 기억도 있다. 사실 아버지 역시도 목소리만 컸지 사실은 착하고 온순한 분이었다.

 

나는 지금의 내가 꿈꾸던 모습의 아버지 이상의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간혹 자부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버지와 같은 보수적인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생각에 나 자신에게 실망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내가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아버지가 집안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아버지는 가족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결혼하고 초년에는 내가 늘 집안의 주인이고 어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다소 보수적이었다. 아니 상당히 보수적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중학교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며 솔직하게 고백한 적이 있다. 가장 예민하다는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이었는데, 그날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쏟았다. 그런데 이 무뚝뚝한 놈들의 표정이 달라지고 눈물까지 흘리는 학생까지 있는 것이다. 강연을 끝내고 돌아가는 내게 ‘아저씨, 짱!’이라고 소리외치며 여기저기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아이들에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도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 내 나이가 벌써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 내가 바라보던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아련하기만 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좋은 아버지로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종종 질문을 던지곤 해본다...

 

 

 

 

 

 

 

 

 

 

아버지 칠순여행 때 던진 말씀이 참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내가 늙어서 빨리 죽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너희들 잘 살아가는 모습 보니까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씀.

 

부디 오랫동안 건강히 살아계시길 소망해본다.

 

커리어코치 정철상은...

인재개발연구소 대표로 대구대, 나사렛대 취업전담교수를 거쳐 대학, 기업, 기관 등 연간 200여 회 강연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진로백서, 서른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아보카도 심리학 등의 다수 도서를 집필했다. 대한민국의 진로방향을 제시하며 언론과 네티즌으로부터 젊은이들의 무릎팍도사라는 닉네임을 얻었으며 정교수의 인생수업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대한민국의 진로성숙도를 높이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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