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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서평,독서법

긍정주의자들을 향한 독설, 그러나 과연 타당한가?

by 따뜻한카리스마 2013. 9. 4.

부제: 동기부여가들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듯한 어조는 지나치지 않은가?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은 한 SNS의 댓글을 보고 구매하여 읽게 된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긍정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긍정 일색으로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정면으로 반박하는 만큼 시도는 신선하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울 정도로 충격적이다.

 

평소에 널리 확산된 긍정적 사고에 대한 위험성을 저자는 느껴왔지만 결정적으로는 저자 자신이 유방암에 걸렸을 때였다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료인들이 저자 자신이 유방암에 걸린 것을 하나의 축복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치 암이 걸린 이유는 부정주의적 사고 때문이고 긍정적 사고를 가지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에 질려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단 암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너무도 광범위하게 널리 퍼진 긍정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책을 꼭 집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분명 저자의 심정은 이해한다. 그럴 수 있겠다는 마음도 든다. 그러나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은 ‘오버해도 너무 오버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용어를 ‘긍정주의’가 아니라 ‘지나친 낙관주의’라고 용어를 변경한다면 맥락이 훨씬 매끄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는 도서에 지나친 낙관주의자들이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일체의 긍정주의에 대한 부정성에 대해서만 강조 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 면에서 ‘긍정주의’ 그 자체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긍정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 정도다. 저자 자신은 ‘과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있을까?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까? 이 책을 긍정하는 아니면 부정하는 마음으로 썼을까? 진정으로 독자를 염려에 뒀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저자가 내세운 대안이라는 것은 간단하다. 먼저 긍정주의를 타파하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이야기는 수많은 긍정주의자들도 한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거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마치 자신이 내세운 유일한 답변처럼 강조한다. 나 역시 누구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을 강조하지만 누구에게나 현실을 직시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상당수의 성인들에게도 해당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나 청소년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다.

 

두 번째로 내세운 대안은 비판의 날을 세우라는 것이다. 이 역시도 많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해법이다. 조직과 사회와 시스템을 감시하고 그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서로 공조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해나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부정주의자는 잘하고 긍정주의자는 못한다는 식의 논리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자신의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저자는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며 임하고 있을까. 저자가 살아오면서 마주친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지내왔을까. 심지어 그녀의 가족이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이런 말은 내가 좀 지나치게 한 면이 있다. 사과한다. 하지만 저자가 내세운 날카로운 독설 해법에 따라 이 책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울 수밖에 없는 나를 스스로 옹변해본다.

 

저자는 대안이 없는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저술의 일부 내용에 대한 꼬투리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긍정주의자들을 향한 가장 긴 악플 책이다. 이렇게 마음껏 비평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저자의 용기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도 그녀에 대한 악플을 늘어놓는 것이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만 그녀가 외국 저자이기에 더 크게 비평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관대히 이해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저자는 이름만 언급해도 알만한 과거의 인물에서부터 현재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파헤쳐 똥바가지를 뒤집어씌운다. 솔직히 말해 저자가 지적한 인물 중에는 나도 그렇게 욕하고 싶은 인물들이 몇몇 있기는 하다. 그런 욕을 들어도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과하다. 일방적이다. 긍정주의자들중에 건전한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의 언급도 없다.

 

본인 입장에서만 기술해서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저자의 주장이 그럴 듯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녀로부터 당하는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녀야 말로 스토커 수준의 악플러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자신의 잘못이나 자기 주장에 대한 반성이나 회의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저자가 강조한 것이 모든 것에 의심을 품는 회의주의자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녀야 말로 자기주장에 확신을 가진 긍정주의자 중에 긍정주의자다.

 

물론 저자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다. 분명 일정부분 맞는 지적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 팽배한 긍정주의적 사고다. 특히 미국의 금융위기 같은 사태다. 위험이 감지되고 있는데 누구하나 부정적인 언급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태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한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조치하다가 결국은 큰 재앙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분명 존재한다. 폭탄 돌리기 식으로 무조건적인 긍정을 요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주식,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의 모든 측면에서 그렇다.

 

그런 면에서 분명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긍정주의가 불러온 위기가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저자처럼 단순화시킨다면 극단적으로 치우친 지나친 낙관주의가 불러온 폐해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긍정주의와 부정주의(또는 회의주의,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부정주의자와 회의주의자를 크게 구분하지 않고 양쪽 다 비슷한 의미로 혼용하여 쓰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말의 의도는 ‘회의주의자’라는 용어로 일관해야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면 적어도 내가 이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상당히 그녀의 이야기를 옹호하고 지지했을 것이다.)는 양극단에 치우친 이야기다. 그런데 저자의 글은 아주 단순하게 두 부류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글을 읽는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솔직하게 말해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기가 더 부담스러웠다. 어쩌면 저자가 마치 악의 소굴이나 범죄 산업처럼 표현하는 동기유발 산업에 속한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일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야 머리도, 몸통도 아니고 꼬리 중에 제일 하단의 꼬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분야에 속한 모든 사람을 욕하는 것 같아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동기유발자가 마치 범죄자처럼 분류되는 느낌이다.

 

물론 나 같은 경우에는 부끄러운 순간들도 많다. 쥐뿔도 없으면서 청중들을 몰아친 적도 많다. 하지만 동기부여가 중에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순진할 정도로 낙관주의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내가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인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긍정주의자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흠집을 내려고 마음 먹으면 흠집 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제는 저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에는 상당한 지식인들도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자기계발이라고 하면 속물들이라 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조롱과 조소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긍정주의가 문제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런 부정주의가 아직도 여전히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관점 때문에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그런 경우에 처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통계자료는 없지만 내가 상담해온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부정성으로 인해 힘들다고 스스로 고민을 토로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정적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실험사례는 수두룩하다. 예를 들면 KBS <마음> 다큐멘터리에서 했던 실험했던 우유 사례를 들 수 있다. 신선한 우유를 실험 참가자들에게 주고 맛이 어땠느냐고 했을 때 실험 참가자들은 모두 다 맛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그 중에 연기자들이 아무래도 상한 것 같다며 부정적인 발언을 토로하자 긍정적이었던 사람들도 부정적으로 바뀐 사례가 있다.

 

이런 사례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공부를 전혀 못하는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지능이 높은 그룹이라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또 한편으로는 모범생 그룹의 학생들을 성적 하위 그룹이라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러나 실험 결과 선생님이 지능이 높은 그룹이라고 믿었던 학생들의 성적이 높게 나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 한 차례의 언급도 없다. 어쩌면 저자는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으로 삶을 분류하고 동기유발 산업에 속한 자들과 그들의 상위에 존재하는 시스템 지배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으로 불행한 삶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감 마저 들었다.

 

나는 성공을 ‘무엇인가를 꼭 성취해야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타인의 가치를 높이고, 이 세상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삶의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삶은 결과가 중요한 것이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못 이루고가 아니라 비록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꿈을 이루려고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해고를 당한 사람에게 ‘그것은 축복이다’라고 말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은 통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어쩌면 저자는 유방암은 겪었을지 모르지만 해고 경험은 없는가 보다. 물론 해고 경험을 당했다고 했다면 해고에 대한 구체적인 비난이 더 있었으리라.

 

부끄럽지만 나는 실제로 해고 경험을 직접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충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해고는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는 사건이다. 고통 중에 고통, 불행 중에 불행한 사건이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지 않고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말인가. 해고가 축복이라는 말이 아니라 ‘해고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든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축복이다’라는 뜻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남이 아니라 나 스스로 수도 없이 다짐했던 말들이다.

 

어쩌면 젊은 날의 나는 현실주의와 부정주의와 지나친 낙관주의에 사이에 휩싸여 꿈과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노력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기계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나도 꿈을 꿀 수 있구나, 아니 꿈을 이룰 수도 있겠구나.’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의식이 깨인 앞선 사람들이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조차 전해주지 않는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필자 역시 행동이 없는 지나친 낙관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가장 강조하는 말 중에 하나가 ‘행동이 없는 낙관주의의 위험성’이다. 그러니까 회의주의자만이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행동이 결여된 낙관주의에 대한 지적이 강조되어야지 ‘긍정주의’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은 아무래도 지나친 저자의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저자가 지적한 회의주의의 폐해에 대해 가까운 실례를 들어보겠다. 저자가 알고 있는 한 지인 중에 한 여성 직장인의 사례다. 이 분은 30대 후반까지도 직장을 다니지 않고 전업주부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시간이 많아서 아이들 학교에 자주 가게 되었고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교육 제도 비판이나 사회제도 비판 모임 등에도 활동하고 되었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온갖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 시각을 날카롭게 세웠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아이 입에서 끊임없이 뿜어 나오는 부정적인 단어들과 학교, 사회, 정치, 경제, 교육 등의 세상 제도에 대한 비판을 듣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밝고 건전하게 성장해야 될 아이의 본모습이 사라진 자녀를 보고 깜짝 놀라 반사회적 운동을 그만두고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식에게 가장 큰 교육은 부모가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사회체제 비판에 대해서도 삼가며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많이 하고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준 덕분에 아이가 훨씬 더 행복해진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저자가 이 사례를 본다면 그녀는 오히려 부모가 아이를 망치는 교육을 했다고 비판하지 않을까. 냉정하게 현실을 마주하도록 가르쳐야지 어떻게 그렇게 무작정 긍정을 심어줬느냐고 하지 않을까. 그런 말을 그녀 아이들에게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내가 이토록 강렬히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긍정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북한과 같은 폐쇄사회에서는 오히려 무조건적인 긍정주의로 강력히 포장해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절대 권력을 가졌던 대다수의 사회들이 그런 긍정성을 의도적으로 조장한 측면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건전한 사회비판 의식은 분명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날카로운 시선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출발점은 나부터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로 서지 않는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바로 설 수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개인에게 국한된 쉬운 제안이라고 폄하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 자신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저자 자신은 잘 모르는가 보다. 한 개인의 힘은 미약하나 한 개인 개인의 힘이 모여 사회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게 될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것보다 더 걱정인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히려 더 당혹스럽게 받아들일 젊은이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어 더 걱정이다. 비평은 많지만 해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책의 말미에 적은 해법은 보면 알 수 있다. 99.99%를 비평하고 0.001%의 코멘트만 대안으로 늘어놓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부유하고, 성공을 거두고, 충분히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행복이 당연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복한 환경이 필연적으로 행복이라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과 감정을 교정하는 내면으로의 여정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위협은 현실적이며, 자기몰입에서 벗어나 세상 속에서 행동을 취해야만 없앨 수 있다. 제방을 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치료제를 찾아내고, 긴급 구조 요원들을 강화하자! 이 모든 것을 다 잘 해낼 수는 없으며 어쩌면 한 가지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행복해지는 내 나름의 ‘비법’을 공개하며 이 책을 맺으려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p282

 

내가 이토록 날카롭게 비평의 날을 세운 것에 저자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긍정주의를 폄하하고, 자기계발에 대해 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저자의 책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음을 저자와 출판관계자는 양해해주길 바란다. 만일 그녀가 조금만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고, 조금만 따뜻한 시선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는 주장을 펼쳤다면 훨씬 더 매력적인 책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주의'의 폐해에 대해 냉혹하게 알려준 것만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페이스북 코멘트:

오늘은 오래간만에 조금 독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써놓고도 조금 과했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어쩌면 동기유발 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몰아세운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에 반발심이 들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책의 저자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 젊은 층에서 긍정과 자기 계발에 대한 조롱 아닌 조롱과 조소의 사회적 풍조가 있습니다. 일부 젊은층에도 있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일부 지식인들이 선도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꽃(꿈, 삶, 의지)을 한 번도 피워보지 못한 젊은이들이 삶을 접어버리는 현상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던 적도 있었기에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 책에 대한 독설을 내뿜은 것이 아닌가 항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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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청춘의 진로나침반>,<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 <가슴 뛰는 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