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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번 직업을 바꾼 남자

가난이 축복이라는 말, 정말일까?

by 따뜻한카리스마 2011. 12. 29.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아버지는 만석꾼의 귀하디귀한 외동아들이었다. 작은 동네였지만 꽤나 재산이 있었다. 40대에는 포드 자동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유년의 기억에는 한 번도 넉넉한 형편으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


젊은 날 아버지는 10여 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지만 뜻하지 않게 불명예로 제대하면서 인생이 뒤바뀌었다. 보급창고장이었던 아버지는 부하직원이 물건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아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억울하다고 통곡만 하다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직장생활도, 사업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결국 만석꾼 집안의 재산을 단 한 푼도 남김없이 모조리 날리고 말았다.


내가 여섯 살 무렵, 우리 집은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어머니 외가 친척의 도움을 얻어 4천 평 정도의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입에 풀칠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십여 명의 소작농을 부리던 아버지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집 한 채도 없이.


살 집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부모님은 폐차된 고철 버스를 구입했다. 일반 버스의 바퀴와 의자 등 내부 시설을 모두 뜯어낸 빈껍데기 버스였다. 요즘으로 치면 컨테이너 박스 같은 임시 구조물이라고 보면 되겠다. 우리 가족은 이런 곳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의 나는 초라한 집이 싫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마을을 벗어났던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고작 두세 명 정도 집에 놀러 왔을 뿐이다. 그 친구들은 우리 집을 오히려 신기해했다. 버스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박 농사를 위해 지어놓은 원두막도 친구들에게는 낭만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 네 식구는 버려진 버스를 개조해서 살았고, 이웃 사람들은 우리 집을 ‘버스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가난보다 더 싫었던 것은 비오는 날이었다. 장마철이 되면 밤새 내린 빗물로 버스 지붕에서 빗물이 샐 뿐 아니라 물이 가득 고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온 집안 식구들이 자다가 일어나서 밤새도록 바가지를 들고 빗물을 퍼내야만 했다. 사실 이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비가 그쳐도 땅의 진흙이 쉽게 마르지 않아 걸어 다니기 불편하다는 점이다.


학교로 다니던 길은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었다. 여름도 그렇지만 특히 겨울이 되면 더 불편했다. 땅이 얼었다가 녹았다가를 반복해서 비가 그친 뒤에도 보름씩이나 땅이 질퍽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리곤 했다. 친구들이 볼까 봐 부끄러웠다. 그래서 학교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물이 고여 있는 곳에서는 무조건 신발의 흙을 씻어내곤 했지만, 신발 구석구석까지 묻은 진흙을 물 몇 방울로 씻어낼 수는 없었다. 학교에 도착 할 즈음이면 어느새 진흙이 굳어 있었고, 그러면 나 혼자만 잔뜩 흙을 묻혀서 교실을 더럽히는 것 같아 민망했다. 그래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책상 아래에 다리를 오므리고 있었던 기억도 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부모님이 농사를 짓던 4천여 평의 땅이 팔렸다. 바로 옆에 도시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처음에 사뒀을 때보다 땅값이 20, 30배가량이나 올랐다. 하지만 부모님 땅이 아니었기에 우리 가족은 10여 년간 그곳에서 살았지만 제대로 보상을 못 받았다. 돈 몇 푼 받고 쫓겨나다시피 그 땅을 벗어나야만 했다.


부모님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당장 어디서 기거해야 할지, 앞으로 어린 것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철없던 난 그런 절박한 집안 사정을 몰랐다. 단지 시골 땅을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비가 올까 불안해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 곳을 벗어난 이후로는 비오는 날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우리 가족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부산 동래 복천동이라는 곳으로 이사했다. 당시는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산동네의 못살던 지역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바뀌었지만. 부모님은 그곳에 조그만 사글세 집을 하나 얻어 만화방을 차렸다. 버스집보다 더 작은 단칸방이었다. 집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나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저 환경이 바뀌었다는 게 즐거웠다. 무엇보다 진흙탕을 벗어나서 좋았고, 만화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어서 신났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내가 농사일에 손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여러 가지 장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서 내가 삶에 대한 절박함을 빨리 깨닫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는 아버지가 가졌던 마지막 자존심이자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어쩌면 그러한 부모님의 깊은 사랑과 믿음이 알게 모르게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짠돌이처럼 구두쇠는 아니지만 적어도 아껴 쓰는 것이 내 몸에 배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불필요한 곳에 돈을 낭비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일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라는 나름대로의 철칙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친구들에게 궁색하다고 불릴 일은 거의 없었다. 웬만하면 돈이 들 만한 자리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오해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대학 신입생 때였다. 같은 과 친구 한 명이 밥을 사라고 강요했다. 나는 싫다고 말했다. 물론 내가 사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밥을 사야 되는 이유가 글쎄 잘사는 집 아들이기 때문이란다. A라는 친구가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그 친구의 밥값을 잘사는 내가 내라고 B라는 친구가 말하는 것이다.


이유가 타당하지 않아 거절을 하자, B라는 친구는 “너는 잘살잖아!” 하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하긴 내 외모가 귀티 나기는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농담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티격태격 말싸움이 오가던 중에 버스집에서 가난하게 성장해온 내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B에게 들려줬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몹시 겸연쩍어하며 “미안하다, 내가 오해했다” 하고 사과했다.


어린 시절의 내 가난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라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어린시절의 내 가난은
단순한 추억을 뛰어넘어

내 삶의 밑천이 되었다.
가난이 축복이라는 말이 이제야 믿겨진다.


혹시라도 가난이 당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가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라!

내게는 그 가난이 내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가난하다면
삶의 절박함을 온몸으로 익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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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저서: <서른 번 직업을 바꿔야만 했던 남자>, <심리학이 청춘에게 묻다>, <가슴 뛰는 비전>